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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눈물

박찬운 교수 2015. 9. 27. 04:41

소년의 눈물


(이 글은 내 인생 최초의 공개 고백록이다. 며칠 동안 고민했다. 이런 글을 페북에 올려도 되는 지에 대하여...)


창밖에 가을바람이 소슬하다.

지난 주 ‘내가 페북에 빠진 이유에 대하여’를 올렸더니 많은 분들이 뜨겁게 공감해 주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나는 그 글에서 수다는 여자들의 전매특허가 아니라고 했다. 남자도 가끔은 수다를 떨어야 한다. 마음속에 있는 말을 누군가에게 내어놓고 살지 않으면 병이 된다.

이제 밤이 되니, 어쩐지 마음이 감상에 젖는다. 진짜 수다—아니 이것은 진지한 고백이다--를 떨고 싶다. 비록 우리가 허공에서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더라도 좋다. 나는 지금 마음 속 깊이 오랜 세월 자리 잡고 있는 이야기 한 보따리를 풀어 놓지 않으면 안 된다.

많은 분들이 나보고 인상이 좋다고 한다. 좋은 집안에서 큰 어려움 없이 자란 흔적이 역력하다고 한다. 귀공자 스타일이라나?(정말 그런가요? ㅎㅎ)

페친 중에서도 나에 대해 그리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페북에 올린 사진을 보면 폼 잡은 모습이 제법 그럴듯하다. 공부도 하고, 여행도 좋아하고, 예술에 조예가 있는 것도 같고... 뭐 하나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어쩜 그렇다. 나는 일찌감치, 그것도, 20대 초반에 법률가가 되었다.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잠시나마 외국에서 공부했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교수가 되었다. 나는 세계 여러 문명유적을 찾아 다녔고 지금도 틈만 나면 배낭을 짊어지고 미지의 세계로 발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하지만...페친들은 나의 과거를 알면 무척 놀랄 것이다.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어렵게 학창시절을 보냈고, 천우신조로 법률가가 된 이른바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면 말이다.

우리 집안은 참으로 어려웠다. 가진 것도 없고, 가족, 친척 중에는 배운 사람들도 없었다. 5남매 중 유일하게 나만이 대학교육을 받았다. 그런 이유로 형제사이에서도 삶의 격차가 크다. 그것이 평생 내 어깨를 짓누른다. 한 집안에서 유일하게 다른 생활을 하는 사람의 고독함, 페친 중에서도 더러 그것을 경험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형제들 중 내가 좀 잘 되었으니 집안에서 부담해야 하는 몫이 큰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그 부담보다도 형제간에 마음을 내놓고 대화하지 못하는 것이 더 불편하고 마음이 아프다. 우리 형제들은 명절날이라고 오랜만에 만나도 말들이 없다. 내가 사실 어딜 가도 말이 없는 사람이 아닌데 정작 형제들 앞에서는 말이 없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도 형제가 만나 그저 밥만 먹고 헤어지는 관계가 지난 30년간 계속되었다.

더군다나 우리 집안엔 한국 전쟁의 상흔이 유난히도 깊이 배어있다. 긴 이야기는 이곳에서 하기 힘들지만—언젠가 할지도 모른다-- 전쟁은 나의 외가를 완전히 파탄시켰다. 어린 시절 자주 외가에 갔지만 거기엔 홀몸이 되신 외할머니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딸같이 키우는 나의 누이가 있을 뿐이었다.

부모님은 틈만 있으면 자식들에게 어디 가서 튀는 행동을 하지 말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씀을 귀가 닳도록 하셨다. 그런 말씀을 하실 때면 반항심에 저는 그리 못 삽니다라고 소리치고 대들고 싶었지만, 집안의 기둥이란 생각에, 차마 그러지도 못했다. 가난한 집안 자식은 철이 일찍 드는 법, 나는 일찌감치 부모님이 얼마나 어렵게 사셨으면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이해를 하는 아들이 되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하루도 우울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내 가슴 속 한 가운데에 진하게 남아 있는 우울, 고독이란 글자는 내 어린 시절이 준 상처였다.

내 고향은 충청도 어느 벽촌. 나는 그곳을 떠나 70년대 초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우리 집이 정착한 곳은 청계천변. 그때까지 수많은 판자 집이 뚝 방 양쪽에 진을 치고 있었다. 자연스레 뚝 방 동네 친구들과 함께 초등학교를 다녔다. 나나 뚝방 동네 아이들이나 사정은 오십 보 백보였다.

방 한 칸에서 여섯, 일곱 식구가 함께 잠을 잤다. 한 밤 중 옆으로 누었다가 돌아눕기라도 하면 내 자리는 어디론지 없어졌다. 아침마다 몇 가구가 함께 쓰는 공동 화장실을 사용할 때의 어려움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나는 지금도 화장실에 가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그 버릇은 어린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내 부지런함은 그런 생활 속에서 키워졌다. 조금이라도 마음 편히 화장실에 있으려면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일찍 일어나야 하고, 조금이라도 동작이 빨라야했다. 이런 기억은 시간이 아무리가도 내 기억 속에 지워지질 않는다. 생각만 해도... 눈가에 눈물이 고인다.

나는 성장한 이후에도 옛 생각을 많이 하면서 살아 왔다. 십 여 년 전 사무실에서 일을 하던 어느 날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30년 전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 때, 시아닌 시, <소년의 눈물>을 썼다.

오래 동안 일기장에 감추어둔 그것을 오늘 내어 놓고 조용히 읽어 본다.


소년의 눈물

1973년 10월 10일 
어머니 손에 끌려
00초등학교 5학년 1반
문턱을 넘었다.

이OO 선생님
굵은 검은 뿔테 안경 너머
번뜩이는 눈매에서 서울 선생님의
모습을 보았다.

첫날, 배우지도 않은 산수시험
형편없는 점수
짝꿍 김OO의 냉소 짓는 얼굴
30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선생님 왈, 너 오늘 처음 왔지
그래 오늘은 봐 주마
60점 아래 다른 친구들
손바닥 얼얼토록 맞는 모습에서
앞으로 닥칠 비정한 서울이 보였다.

셋방살이 좁은 방
밤 10시 일일 연속극이 끝나면
가족들은 일찍 잠이 들었다
집안의 희망 그 때서야 책장을 넘겼다.

소년의 눈가에는 
항상 우수가 넘쳤다
80명이 넘는 동급생들 
그 중에는 소년보다 훨씬 우울한 
친구도 있었다.

어느 날 동급생들과 
쌀 1말, 라면 2박스 어깨에 메고
청계천변 사람 살 곳 아닌 곳에 
살고 있는 친구를 찾았다
돌아오는 길 우리 모두는 울었다

내가 어른이 되면, 우리가 어른이 되면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생일 날 케이크 한 쪽 먹어볼 신세는 될 수 있을까

꼬박 30년이 지난 오늘
아련한 추억의 한 가닥을 잡아당기니 
오랜 세월 고였던 소년의 눈물은
메말라 있던 내 가슴을 타고 
한 없이, 한 없이 흘러내린다. 
(2004. 11. 29. 사무실에서)


어린 시절 나의 삶이 이런 것이었기에 나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오로지 고시공부에 매진했다. 하루라도 빨리 시험에 합격하여 내 신분을 바꾸고 말겠다는 일념 그것 밖에는 없었다.

하늘이 도왔던지, 일찌감치 법률가가 되었다. 그런데... 나의 고민은 다시 시작되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이었다.

지난 30년간 내 주변에는 나와 비슷한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어린 시절, 그들도 어려웠다. 시골에서 상경하여 맨 손으로 세상과 싸운 이들이다. 그들도 고시를 합격하고, 결혼해 애를 낳고, 집을 마련했다. 사회적 지위도 얻었다. 누구말대로 출세한 것이다.

나와 여러 친구들이 자수성가를 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그 ‘이룸’이 과연 어린 시절 우리들이 꾼 꿈이었을까 하는 회의를 갖게 되었다. 무엇이 성공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었다.

자수성가? 많은 사람들의 꿈이지만 그것을 이루어 낸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성숙한 인간으로서는 부족함이 많았다.

『그들은 대개 고집이 세고, 자아가 강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한다. 그들은 대개 돈을 중시한다. 자기 돈 쓰기 싫어하고 얻어먹는 것에 익숙하다. 그들은 대개 생업에 관계되는 공부만 하지 다른 공부는 하지 않는다. 교양이 부족하니 세상을 자신이 습득한 얄팍한 지식만으로 재단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들의 삶은 각박하고 낭만이 없다.』

나는 젊은 시절 자수성가형 사람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것들에 매우 예민했다. 아직 뭐 하나 제대로 갖추질 못했음에도, 나는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고, 돈에 관대하고, 교양 있고, 낭만이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 단순히 자수성가한 사람이 아니고 거기에다 귀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 연구실에 아직도 링컨 대통령 초상화를 걸어 둔 이유는 딴 데 있지 않다. 링컨처럼 어려운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귀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염원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욕심인 줄 알면서도.

나는 지금도 내 삶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다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내 삶엔 슬픔과 고독이 누구보다 진하게 남겨져 있고, 그것을 이기기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는 것, 그리고 그 삶이 세속적인 욕심으로 얼룩지는 것을 원치 안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폭 넓은 공부를 하려고 노력했고, 세상을 돌아다녔으며, 사랑과 낭만을 찾아 헤맸다.

가을밤이 깊어간다.

(2014.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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