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일반

수정같이 맑은 정신, 박홍규

박찬운 교수 2019. 12. 22. 11:25

수정같이 맑은 정신, 박홍규

-고독한 독서인 박홍규와 작가 박지원의 대화, <내내 읽다가 늙었습니다>를 읽고-

 

 

 

 

 

 

당신 얼굴에 나타난 것은 / 어떤 권력도 빼앗을 수 없는 것 / 어떤 폭탄도 산산조각으로 부수지 못할 / 수정같이 맑은 정신(조지 오웰이 스페인 시민전쟁의 무명용사를 노래한 시)

 

나는 보이지 않는 대담의 참여자

학기가 끝나 성적처리를 한 다음 잠시 짬을 내 한 권의 책을 읽었다. 젊은 작가 박지원이 영남대 교수를 지내고 이제 부인과 함께 노후의 삶을 보내고 있는 박홍규 교수와 10여 차례 대담을 하고 엮은 <내내 읽다가 늙었습니다>라는 책이다.

나는 지난 20여 년 동안 꽤 많이 박홍규 교수의 책을 읽었다. 그래 보았자 그가 쓰고 번역한 150여 권 중 3분의 1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것들 중 상당수는 내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책은 고독한 나의 삶에 하나의 등불이었다. 그는 나보다 대학 학번으로 말하면 꼭 10년 연상의 선배다. 그 정도의 선배, 아니 그 이상의 선배 중에서 기라성 같은 이들을 찾자면 별처럼 많지만, 박홍규 만한 영향을 끼친 선배는 없다. 그는 내게는 산과도 같은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이 책에서 이야기한 내 삶은 실패의 전형이다. 적어도 이 땅의 상식으로는 그렇다. 소위 일류 대학도 나오지 못했고 일류 직장도 없었다. 단 한 번도 경쟁에서 이긴 적이 없고, 이기려고 노력해본 적도 없다. 또 그것을 후회한 적도 없고, 안타까워한 적도 없다. 대학교수의 직함을 달곤 있었지만, 평생 내가 좋아한 일을 하며 고만고만하게 살았을 뿐이다."(459)

그러나 이 말은 내게는 지극히 겸양의 말일 뿐이다. 그가 싫어하는 성공의 잣대를 굳이 끌어다 쓴다고 해도 그는 성공한 사람이다. 아마 한강 이남에서 그만큼 성공한 이는 해방 이후 없을 것이다. 그는 문필가로서 성공했고, 독서가로 성공했고, 사회비판가로서 성공했다. 세칭 이류 삼류라 불리는 사람도 얼마나 훌륭하게 살 수 있는지, 일류가 부러워하는 진짜 일류가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내가 아는 한, 해방 이후 대한민국 문필가 중 딱 한 사람만이 박홍규와 비견될 수 있다. 서울대 교수를 지내고 작년 타계한 김윤식 교수다. 인생 전체 오로지 읽고 쓰면서 우리 문학사에 남는 200여 권의 책을 남긴 김윤식 교수 그리고 인문학 전반에 걸쳐 종횡무진 글을 쓰고 번역을 해온 영남대 박홍규 교수(박홍규란 이름의 유명 교수가 한 분 더 있다. 서울대에서 철학을 가르친 분이다. 독자들은 여기에서 말하는 박홍규는 영남대 교수 박홍규라는 것을 잊지 말라) , 내 머릿속엔 이 두 사람의 이미지가 또렷이 각인되어 있다.

 

 

 

 

 

우연하게 이 책의 출간 소식을 들었다. 한 평생 매일같이 도서관에 다니며 150권이 넘는 책을 쓰고 번역했던 사람, 책과 활자 속에 파묻혔던 힘을 통해서 이 사회를 가장 날카롭게 성찰할 수 있던 사람이 한 젊은 작가와 담담하게 인생 전체를 풀어냈다는 것이다. 그가 읽은 독서에 대해, 고독에 대해, 사회에 대해 그리고 인간에 대해. 그 소식을 듣자마자 책을 구입했다. 불과 2주 전에 나온 따근 따근한 책이다. 책이 도작하자 단숨에 읽었다. 하지만 매우 꼼꼼하게 읽었다. 461쪽의 책 거의 모든 쪽에 밑줄을 쳤다. 올해 읽은 책 중에서 이렇게 자세히 읽은 책은 없다.

약간 아쉬웠다. 내가 그 대담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것이. 만일 이런 대담 소식을 일찍 알았다면 어떤 '빽'을 써서라도 3인 대담으로 했을 것이다. 나도 물어볼 말이 많았으니.... 그런 이유로 이 글은 다른 북 리뷰보다 길다. 나는 이 글을 그냥 이 책을 요약할 생각으로 쓰는 게 아니다. 나는 두 사람의 대담에 소리 없이 참여한 제3의 인물로서 이 글을 쓴다. 그들 대화 중 내 귀에 들린 말, 그 중에서도 내가 그동안 박홍규의 생각에 경의를 보낸 바로 그것들을 골라내, 내 방법으로 채록했다. 그리고 그것을 묶어 이 글을 만들었다. 주의하시라. 이 글은 길다. 그냥 단순한 북 리뷰가 아니다.

수정같이 맑은 지식인, 박홍규

글을 시작하면서 박홍규 교수가 어떤 인물인지 잠시 소개하자. 그 소개도 이 책의 한 부분을 그냥 옮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책이 나오기 전에 원고를 읽었던 모양인데, CBS의 정혜윤 작가가 추천사를 통해서 한 말이다.

“우리 사회의 ‘지식인’이라 불리는 이들 중 박홍규 만큼의 외골수를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자발적인 단독자의 길을 택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는 좌우를 떠나 모든 진영과 집단의 패거리 문화를 진심으로 싫어했다. 그는 독재자에 분노했고, 사법부에 분노했고, 재벌에 분노했으며, 겉으로 사회 정의를 외치면서도 뒤로는 제 이득을 챙겨오던 모든 민주인사들에 분노했다. 그는 이 끈끈하고 텁텁한 한국 사회에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꿋꿋한 길을 걸어왔다.”(8-9)

위의 소개가 총론이라면, 박홍규의 삶을 볼 수 있는 각론은 이렇다. 그가 말하는 박홍규의 하루의 삶이다.

“보통 새벽 2시에서 3시 사이에 일어나고요. 저녁 8시에서 9시 사이에 잡니다. 하루에 대여섯 시간 자는 것 같아요. 새벽에 일어나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그러지요. 이 새벽이 제가 제일 집중적으로 작업을 하는 때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다가 봄이나 여름이면 아내와 함께 아침 7시에서 8시까지 밭일을 한 후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나오죠. 한 9시에 학교에 도착한 후부터 오후 5시까지 도서관을 둘러보고, 도서관 안의 지금 이 방, 명예교수열람실에서 또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그러다 저녁에는 6시 정도부터 한 시간, 필요할 때는 하루에 두어 시간 남짓 밭일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집에 돌아옵니다.”(32-33)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아웃사이더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경우에 따라서는 불행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콤플렉스도 느낄 것이다. 나도 그렇다. 나도 오랜 세월 이런 감정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 박홍규 교수가 이 책을 박지원 작가와 함께 낸 것도 이런 사람들을 위한 것일 게다.

"이 책을 읽는 분들이 저를 포함해서 누구든 조금도 이상화하거나 절대화하지 말고, 제가 저의 삶을 솔직하게 말씀드림으로써 누구나 다 똑 같이 고민하고 있고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그분들이 살아갈 때 , '그래, 누구나 다 그렇지, 그렇지만 그런 고민과 방황에도 힘이 있지. 박홍규의 얘길 들어보니 그 정도는 인정할 수 있겠다'라는 것을 제가 조금만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참 다행일 거라고 생각합니다."(36-37)

독서란 무엇인가

박홍규에게서 책은 뗄 수 없는 존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읽고 또 읽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는 죽기 전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을 것이다. ’독서인=박홍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책을 읽는 일은 그 자체가 즐거웠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그 자체가 말이죠. 독서가 제가 살아가는 데, 또는 제가 어떤 곤경에 빠졌을 때 직접 무슨 도움을 주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독서가 제게 미친 어떤 영혼의 힘 같은 걸 항상 느끼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행위가 없었더라면 제가 과연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77)

박홍규가 책을 통해 알아온 것, 신념화한 것은 다양성의 가치관이다.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자유주의자로 자리매김한 것도 결국 다양성의 가치관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유로운 개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언젠가 이 공간에서 ‘멋대로 살라’고 한 글을 썼는데, 그 글과 오버랩되는 말이다.

”자유로운 개인이란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충실하고, 자기다운 삶을 사는 사람을 일컫는 게 아닐까 싶어요. ... 그래서 저는 가능한 한 다르게 살아라, 자기만의 삶의 스타일을 추구하라고 학생들에게 자주 얘기하곤 했어요. 이런 인간과 사회의 다양성이 제가 생각하는 가장 소중한 삶의 가치인 것 같습니다.“(81)

그는 독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빈약한 우리나라의 독서문화를 질타한다. 어느 집을 가도 변변한 서재 하나가 없다는 것이다. 문화 선진국이란 다름 아닌 각각의 가정에 아담한 서재 하나씩을 갖는 그런 나라일 것이다.

”제가 지금 무슨 브리태니커 사전을 장식처럼 꽃아 놓는 서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책들, 오랫동안 모은 책들로 차곡차곡 서재를 만든다는 것이야말로 한 사회가 축적한 문화의 상징, 지성의 상징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린 그런 문화가 없어요. 저는 우리도 그런 문화를 바랍니다.“(88)

독서를 말함에 있어 우리의 정치인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국회가 동물국회가 된 근본적 이유가 무엇일까. 정치인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이다. 번듯한 국회도서관은 있지만 그것을 이용하는 의원들이 과연 몇이나 된다는 말인가.

”한 사람의 정치인이 정치를 시작하게 되는 데 독서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큰 작용을 하게 마련입니다. ... 히틀러든, 처칠이든, 체 게바라든, 호지명이든, 간디든 누구나 마찬가지예요. 책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관을 수립한다거나 자기만의 삶의 자세를 조탁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우리나라 정치인의 경우엔 좌우를 막론하고 책을 읽지 않고, 책을 통해서 진지하게 자신의 정치관을 세우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89)

독서 없는 지식인 그룹 중에서 정치인과 함께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대표그룹은 법률가들이다. 오늘 날 우리사회의 각종 사법부조리가 만연하고, 전대미문의 사법농단 사태, 검난이라고 불릴 만큼의 심각한 검찰권 남용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다양성이 부족한 법률기계로 양성되는 과정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을까. 로스쿨 교수로서 머리를 들 수 없는 현실이다.

”제가 30여 년간 법과대학에서 예비법률가들을 가르친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교육제도에 있어서 가장 빈곤한 게 독서라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 법률가가 된다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법률교과서, 육법전서를 거의 달달 외우는 수준으로 공부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다양한 사고의 실험도, 공감의 경험도 법률가를 지망하는 20-30대 청년의 머릿속에는 작용하지 않게 되는 것이고요. 그야말로 교조적인 두뇌가 형성되는 것이요.“(91)

빈센트 반 고흐를 사랑한 박홍규

내가 사실 박홍규 교수를 알게 된 결정적 계기는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해 쓴 책을 통해서다. 나 또한 좋아하는 화가가 고흐인지라 그에 관한 책을 이리저리 찾았는데, 흥미롭게도 볼만한 책은 죄다 법대 교수 박홍규 교수가 쓴 것이었다. 고흐 평전인 <빈센트 반 고흐>,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번역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고흐의 독서 세계를 쓴 <독학자, 반 고흐가 사랑한 책> 등등. 도대체 박홍규는 고흐를 왜 그리도 사랑했는지... 아마도 그것은 박홍규가 보여준 삶의 궤적에 답이 있으리라. 노동에 대한 경외심과 삶에 대한 열정, 고독한 삶에 대한 동질감을 그의 그림 속에서 발견한 것이다.

 

 

박홍규 교수의 빈센트 반 고흐 시리즈물, 맨 위는 맨 처음 출간된 평전, 중간은 고흐의 편지 번역서, 맨 아래는 고흐가 읽은 책을 소재로 한 새로운 고흐 평전
내가 쓴 <빈센트 반 고흐 새벽을 깨우다>. 이 책은 고흐의 그림을 나만의 독특한 시각에서 해설한 책이다. 박홍규 교수의 고흐 시리즈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한다.

 

 

”빈센트 반 고흐는 평생 자신의 육체로 무언가를 생산해내는 노동자들에 대한 경외를 가졌고, 자기 자신을 노동자 화가로 분명하게 인식했어요. ... 우리나라에선 고흐에 대해 ’천재‘ 또는 ’광인‘이라는 식의 지극히 이분법적인 묘사만 가득했고, 저는 여기에 대해서 큰 반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101)

”사실 고흐의 서른일곱 생애란 굉장히 고독한 생애예요. 정말로 고독하죠. 어떤 의미에선 루저의 생애이고, 소외된 생애이며, 사회적 아웃사이더이 생애입니다. 그런데 고흐는 아웃사이더로서의 자기 삶의 고통을 그림이나 독서를 통해 표출하고 있죠. 고흐가 아웃사이더로서의 자기 삶을 인사이더로 만들기 위하여 결정적이고 격렬하게 쏟아냈던 결과물이 바로 고흐의 예술일 거예요. 그리고 저는 그 그림을 뒷받침해주는 어떤 사상이랄까, 생각의 기본적인 틀은 독서라고 봐요.“(107)

오리엔탈리즘, 문화적 제국주의 비판

우리는 언젠가부터 서양의 동양에 대한 우위를 당연시 한다. 사실 우리가 공부하는 거의 모든 것이 서구가 만들어 놓은 것을 추종하는 것이다. The West is beautiful! 이라는 것은 하나의 공리다. 곰곰이 생각하면 이것은 서구인이 만든 서구중심의 프레임이다. 이것을 대표하는 용어가 오리엔탈리즘으로 이것은 이집트를 포함해 중동에 대하여 오랫동안 폄훼와 왜곡을 일삼았던 일종의 사상적이고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역사와 흐름을 말한다. 이 오리엔탈리즘의 실체를 밝힌 이가 바로 에드워드 사이드다. 박홍규는 그의 주요저작 두 권을 번역한다. 하나가 <오리엔탈리즘> 또 다른 하나가 <문화와 제국주의>. 이들 번역을 통해 그는 ”무엇에 대해서도 숭배하거나 추종하지 말 것, 어떤 우상이든 철저하게 분석하고 부수어버릴 것“(124)을 학습했다.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은 서구만의 의식문화가 아니다. 한국의 사회 곳곳에서도 다른 층위로 발견되는 바, 진보층이라도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른다. 타인에 대한 비판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선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존재들에 대해 비판적 정신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진보에겐 그것이 부족하다.

”교수들끼리 모여서 대통령과 정치인들을 비난하고 욕하는 일, 무슨 성명서를 쓰거나 선언문을 쓰는 일, 그건 사실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게 아니라 정말로 자신이 공부하는 분야, 자기가 속한 조직의 권력, 학문의 권위 같은 것을 향해서 철두철미 비판적 태도를 견지해야 할 텐데... 아무튼 저는 바깥세상에 대곤 정의와 진보를 얘기하면서 자기가 속한 학문, 대학, 가정, 학연, 지연, 혈연을 너무 존중하고 아끼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던 것 같아요.“(125)

척박한 번역문화

박홍규는 독서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나라의 척박한 번역문화를 한탄한다. 서점에 가면 널린 게 책이고, 그 중에서도 외서를 번역한 게 적잖지 않지만, 독자들의 번역물에 대한 원성은 높다.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책들이 수두룩하다. 그 분야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들, 곧 교수들이 번역에 참여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현실은 녹록치 않다.

”한국에는 한국 사람들이 한국말로 연구하는 어떤 공통의 자산으로서의 번역 문화라는 게 없다는 얘길 하고 싶은 거예요. 더욱이 우리나라 대학에서는 교수의 연구 업적에서 번역을 완전히 도외시합니다. 대학에서 교수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오로지 논문뿐이니까요.“(130)

가족에 대하여

박홍규 교수는 소위 TK라고 불리는 지역에서 매우 보수적 정서와 맞닥트리며 일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부모님과의 갈등도 많았다. 아버지는 권위적이고 폭력적이었다. 그가 생각한 가족관계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저에게는 (가족이) 일종의 마음의 감옥이자 전통의 감옥처럼 느껴집니다. 예를 들어 관혼상제를 가지 않고, 동창회를 가지 않고, 이런 것은 탈출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가족이라고 하는 것, 부모 형제와 일가친척은 참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찌 보면 제 마지막 한계라는 생각이 듭니다. 탈출할 수가 없어요.“(157)

이런 환경 속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가족문제를 넘어 인간관계를 객관화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학문하는 자의 최소한의 임무라고 생각한 것이다.

”자기 자식이나 자기 부모에 대해서, 즉 모든 인간관계에 대해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객관화, 상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어요. 그렇게 자기 자신을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만 사회에서 학문으로 밥 먹고사는 지식인으로 불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164)

권위주의 꼰대문화로 비판받는 기성세대 그리고 그들이 만든 가족관계에서 우리 모두는 예외일 수 없다. 나도 학교에 있으면서 항상 학생들과 부닥트리는 문제다. 과연 우리는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 시대의 기성세대가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그냥 어떤 스트레스도 주지 않고 그들이 자유롭게 클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야말로 우리 세대의 가장 중요한 의무가 아닌가."(168)

인간관계에 관한 조언

나는 어디에 가도 말 한마디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단골로 말하는 것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이다. 나는 그것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믿는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삶, 그러면서도 당당하게 본인과 타인을 주체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나의 이런 생각은 박홍규 교수의 이 말에서 나만의 고독한 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서로에게 의존한다거나, 그것이 어떤 일체화의 욕망으로 표출되는 건 건강하지 못하다는 거죠. 좋은 의미에서의 고독과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 (결혼식 때 주례) 같은 방향을 향해서 가되 서로 거리를 두어라, 사랑하는 만큼 독립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 각자가 독립된 인격으로서 서로의 자유와 평등을 존중해주는 그런 인간적 관계, 존재적 관계로서의 사랑이 더욱 강조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172-173)

박홍규의 고독

대담 전반에 걸쳐 박홍규는 고독에 대해 말한다. 자신의 삶은 고독한 삶이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박홍규가 말하는 고독이란 무엇일까. 그가 말하는 고독은 단순히 ’타인과 멀리 떨어진 존재‘로서의 고독(loneliness)이 아니다. 영어로 말하면 그의 고독은 solitude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자기의 주관을 발현하고 내세우는 의미로서의 고독이다. 고독이라기보다는 ’독존‘이다.(185) 이것은 내가 외로운 시시한 존재가 아닌 ’나' 자신을 스스로 존엄하게 생각하는 의미의 고독이다. 따라서 이런 고독은 ‘자발적 고독’ 곧 오직 자신을 신뢰하는 적극적이며 강인한 의지의 표현이다. 따라서 박홍규에게 있어 고독은 결코 골방에 틀어박혀 자신을 한탄하는 패배자의 외로움이 될 수 없다.

“사회의 쏠림이나 대세, 흐름에서 벗어나서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과 입장과 태도를 견지할 수 있는 자세, 이것이 제가 집중하는 ‘고독’의 의미입니다.”(187)

“어떤 주류적 이념에 편승하지 않고 자기 나름의 주장과 노선을 지킨다는 것. 그게 고독을 강조하는 저의 입장과 연결되는 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189)

“결국, 고독하다는 건 주체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개인성의 확보와 다르지 않을 거예요. ... 혼자서 사고하고, 혼자서 행동하고,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힘을 갖는 게 고독입니다. ... 그래서 저는 고독을 기본적으로 저항이라고 생각해요”(195)

 

 

박홍규 교수는 아나키즘을 무슨 대단한 사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자유, 자연, 자치 소위 3자주의로 설명한다. 인간에겐 이런 3자를 지향하는 속성이 있다. 이런 속성을 강조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나키스트라 불릴 수 있다.

 

 

SNS 시대의 인간관계

박홍규 교수는 SNS 시대에서 핸드폰이 없는 삶을 산다. 나는 이런 삶이 꼭 좋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것은 어쩜 반문명의 자세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극단의 통신혁명 문화에서 알게 모르게 잃는 게 분명히 있다. 그게 무엇일까?

“제가 보기엔 모두가 SNS 에만 집중하고, 그 세계에만 주목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정말 획일적으로 느껴지죠. 이처럼 획일적인 집중화에서 멀어진 삶이 오히려 좀 더 개성적이고 자기다울 수 있는 건 아닐까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 변방의 삶, 주변의 삶이 충분히 주목받고 존중받아야 진정한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204)

핸드폰을 손에서 떼지 못하는 게 이 시대의 특징이고 나 또한 예외가 아니지만 이런 말만은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특히 전철 내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핸드폰을 얼굴에 대고 큰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을 구별하라!

“저는 다만 공적 공간에선 핸드폰 사용을 가급적 자제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공공의 공간에서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필요가 있는 거예요. 그래야지 비로소 대화가 되고 토론이 되는 게 아닐까요? 우리가 ‘공적'인 교류의 공간, 대화의 공간이라고 믿고 있는 곳에서마저 저마다 자기 손안의 핸드폰에 몰입하고 있다면,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얼굴 없는 사회가 되어버릴지도 몰라요.”(207)

“지하철이라는 하는 곳은 기본적으로 한국 사람들에겐 ‘공적 공간’이 아닌 거예요. 다들 자기의 사적 공간으로 생각하는 거죠. 제가 핸드폰 문화의 가장 큰 병폐 중 하나로 생각하는 것은 공사의 구분이 없어졌다는 것이에요. ... 모든 사람이 하나의 공적 공간에서 모두가 제각기 전화 통화를 하는 사회, 하나의 공간에 모여서 서로 모르는 이야기를 각자가 줄줄 읊고 있는 사회, ‘프리바토피아’란 용어가 잘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공적 감각이 없어지고 사적 공간이 지나치게 확대된 사회, 이처럼 공적인 가치가 점점 더 몰각되고 개인의 충동에 민간해진 사회는 점점 더 위험해질 수밖에 없죠.”(209-210)

“저는 핸드폰을 많이 쓰는 분들이 그거 하나만 지켰으면 좋겠어요.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서는 묵음을 해달라, 전화를 받을 때는 밖에 나가서 받아달라, 공공장소에서는 공공의 조용함을 지켜달라, 공공사회에선 공공사회의 예절과 미덕을 제발 지켜나가자.”(236)

CCTV 감시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감시 하에 있다. 집을 나가는 즉시 일터에 도착할 때까지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우리의 모든 삶은 누군가가 보고 있다. 이것을 과연 문명이란 이름으로 용인할 것인가.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가 보장되기 위해선 반드시 일정한 영역의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나의 세계’라고 하는 것 말이죠. 내가 공적인 공간에 있다고 해서 내 행동이 철두철미 감시당하며 어딘가에 기록되고 있다? 그것은 좋게 말해서 공개된 사회이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감옥과도 똑같지 않나요? 그런 사회는 우리 모두를 잠재적인 범죄자로 취급하는 거대한 파놉티콘과 다를 바가 없죠.”(212)

‘붉은 악마’의 열광 속에서도 고독을

언젠가 노엄 촘스키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거기에서 어린 시절 이후 이제까지 스포츠 경기에 가서 응원을 해본 적이 없다는 이야길 듣고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생각에 안도의 숨을 쉬었다. 정서적으론 나도 대한민국의 아들이고 누구보다 대한민국이 잘 되길 바라는 사람이지만, 집단적인 응원은 왠지 마음이 불편할 때가 많다. 왜 그런지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낀다고나 할까. 여기 또 한 명의 노엄 촘스키가 있다.

“2002년 월드컵 때 ‘붉은 악마’ ... 전 국민적인 열광 분위기가 딱 질색이었죠. 스포츠를 보고 그렇게 열광하는 일도 가능하겠다 싶긴 합니다. 그렇지만 저에겐 거대한 태극기, 쩌렁쩌렁한 애국가, 수십만 명의 똑같은 율동 등이 마치 매스게임 비슷하게 느껴진 거죠. 집단주의의 표상처럼 보였던 것이고.”(227)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리의 개성 없음을 아쉬워하는 것이다. 좀 남과 다르게 사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일까.

“내 나름으로 생각도 하고, 표현도 하면서 나다운 삶을 살아가는 게 가장 멋진 삶이라는 평범한 인생관, 평범한 가치관이 너무나 부족한 것 같아요.”(218)

젊은이들에게

박홍규 교수가 지난 30년 간 만났던 학생들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같은 길을 걷는 후배로서 관심이 가지 않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젊은이들에게 제가 항상 하고 싶던 이야기가 이것이었습니다. 세계를 좀 더 폭넓게 파악하고 언제나 지적인 호기심을 가져주면 좋겠다는 것이요. 모든 젊은이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제가 만났던 꽤 많은 학생이 보통 생각하는 범위가 너무도 좁은 것 같다는 아쉬움, 또 이 세상을 별로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는 답답함이 있었거든요. 무언가 새로운 것에 대해서,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적인 모든 사건에 대해서 항상 관심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나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열린 시야랄까요. 그런 게 참 중요하지 않나, 이런 이야기를 드리고 싶어요.”(232-233)

우리는 어떤 사회를 바라는가

자유와 독립을 말하는 게 자칫 공허하기 쉽다. 이 문제를 오로지 개인의 의지 문제로 환원시킨다면 근본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따라서 자유와 독립을 강조한다면 반드시 사회 개혁을 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절대적인 단독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유롭고 독립적인 정신은 사회제도와 연결되어야 비로소 그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박홍규 교수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한 사람이 고독하게 살기 위해선, 적어도 그의 최소한 생존을 가능케 해주는 어떤 사회적 제도적 인프라 같은 것이 담보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누군가의 자발적인 고독의 결단이 가능한 것이죠. 당장 내 생존이 담보되지 못하는데, 내가 어떻게 나만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우리 사회의 건강한 청춘들이 자신이 주장을 하고 자기 나름의 삶을 살기 위해선, 즉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고독하기’를 할 수 있으려면, 그들을 지지해줄 수 있는 제도화된 인프라가 훨씬 더 탄탄하게 갖춰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258)

“한 사회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비율이라는 게 있습니다. 보통 그 비율은 3분의 2가 정규직, 3분의 1이 비정규직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우리는 반반이죠. 다른 나라에 비해 비정규직이 차지하는 비율이 너무 높습니다. 그러니까 비정규직이 자발적 비정규직의 자기 직업을 누릴 수 있도록 인프라가 구축되고, 사회보장제도가 지금보다 훨씬 강고하게 갖춰져야 한다는 것은 우리 대화의 무조건적인 전제가 되어야 할 것 같아요.”(263)

자기 자신에 충실한 삶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삶은 대부분 정해져 있다. 누구든지 제대로 이 사회에서 살기 위해선, 입시경쟁을 거쳐 좋은 직장에 취직해야 하고, 거기서 부를 형성한 뒤 자식들에게 대를 잇게 해야 한다. 경쟁 또 경쟁... 여기에서 살아남지 않으면 인생의 패배자다. 그러나 과연 그 삶이 행복한 것인가. 그래야만 행복이 오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다.

“제가 저보다 뒤에 따라오는 세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해라,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라, 바로 이 말입니다. ... 우리 사회 전체의 가치관과도 직결되는 문제예요.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출세주의, 상위 몇 퍼센트에 들어가야만 인간적으로 살 수 있다고 하는 저 폐쇄적인 엘리트주의를 계속 우리가 용인하게 된다면, 우리 자식 대부분은 구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패배자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238-241)

“저는 젊은이들이 그저 자기가 어떤 삶을 살 때 가장 행복한지에 대해서 좀 더 회의해 보고, 이 사회와 자기 자신을 폭넓고 깊은 시야로 차분하게 관조해나갈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274)

“저는 다음 세대의 청년들에게 네가 재밌고 너의 마음이 끌리는 것을 하라, 그게 더 너의 삶을 더 너답게, 인생을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이다, 그 정도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276)

지방대 출신으로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박홍규 교수를 볼 때 경이롭게 본다. 그는 대한민국 지성사의 한 획을 그은 사람이다. 결코 패배자가 아닌 진정한 승리자다. 그럼에도 지방대 출신으로서 지방에서 살아온 그의 삶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담담하게 이야기하지만 그의 말에서 잔잔한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제가 지방대학을 나와서, 지방에서 살고 있다는 것 때문에 생긴 여러 가지 콤플렉스 같은 것이 없지 않았겠죠. 여전히 제가 그런 것을 다 극복했다고 말씀드리기는 힘들지 모르겠어요. ... 책을 낸다든가, 언론 사회활동 등등을 해나가면서 SKY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그런 것으로 인해서 어떤 장애나 한계를 느꼈던 게 사실이에요. 그 모든 것이 저에게는 하나의 콤플렉스였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278-279)

“돌아보면 서글프고 괴로운 일이 참 많습니다. ... 제 주위에도 (민주화 운동한) 동기나 선후배들이 많이 있어요. 서울에서 그나마 이름 있는 대학에서 학생회장 정도라도 해야 교도소에 다녀오면 국회의원이 될 수 있잖아요. 지역의 대학에선 학생회 활동에 아무리 힘을 쏟았더라도, 교도소에 다녀 온 후에 그런 ‘감투’를 쓰는 게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286)

그럼에도 그에겐 지방출신, 지방생활이 축복이었다. 그가 과연 지방대를 나오지 않고 서울 일류대를 나와 서울 지식인의 한 일원으로 살아왔다면 오늘 날의 박홍규가 어찌 가능했겠는가.

“그래도 제가 본격적으로 책을 쓰는 작업이 1985년 정도부터 시작해서 벌써 한 30년 동안에 그렇듯 책을 열심히 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제가 지방에 살았기 때문일 거예요. 제가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거기서 주로 활동했더라면 지금처럼 책을 읽고 책을 쓰는 작업을 하진 못했겠죠. ... 제가 평생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제 삶이 그런대로 저에게 보람 있게 구현되었던 게 아닌가, 라고요.”(281)

진보지식인들의 패거리 문화

박홍규는 평생 패거리 문화를 싫어했다. 그가 주류에 편승하지 못한 근본적 이유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비주류가 살아남는 길은 주류라는 패거리에 편승하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 들도록 견마지로를 다하고 그들이 나누어주는 떡고물을 받는 것이, 비주류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이런 문화는 소위 진보그룹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가 영남대를 다니면서 본 진보 지식인들의 작태는 이런 것이었다.

“실제로 이분들이(영남대에 온 진보교수들) 이 대학에 기여한 바는 거의 없어요. 영남대학에서 학자를 키운 적도 없고요. 그 진보 지식인 중에서 이 대학 학생들에게 석 박사 학위를 주었다거나, 학술논문을 제대로 썼다거나, 학부생들에게 교수로서 제대로 된 강의를 했다고 느껴진 사람은 거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기선 흥청망청 술만 먹고, 어떻게 본다면 전부 낭인에 가까운 사람들이었죠. ... 그들은 그렇게 게으르고 흥청망청한 대학 생활을 한 후 정교수가 되어 서울의 대학들로 떠나버리고, 그 뒤 영남대학은 대단히 황폐하게 되어버린 것도 엄연한 사실이에요.”(298)

부부관계란

이 책을 읽으면서 박홍규 교수의 부부관계는 어때했을까 궁금했다. 대학교수라지만 오로지 도서관과 집을 왕복하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남편을 둔 부인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 조금 걱정하면서 대화를 엿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ㅎㅎ. 다음 말을 듣고 아름다운 이 부부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제 아내는 저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깊고 참 관대하고 관용적인 사람이에요. ... 제 아내도 저와 마찬가지로 대단히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잘난 체하고 이런 거는 전혀 없고, 지금 제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도 자리를 너무 미화했다고 화를 낼 게 분명합니다. ... 저는 부모와 형제, 친구와 동료와 친척들과의 인간관계에서의 부족함 같은 게 참 많은 사람인데, 이런 것을 아내는 정말 따뜻하고 적극적으로 메워주고 지지해 주었어요.”(314-315)

“아내는 중학생 시절부터 서예를 한 사람이고, 저는 어릴 때부터 서양 회화를 즐겨 그렸던 사람입니다. 아내는 지금까지도 사서삼경을 비롯해 동양고전을 읽고, 매일 아침이면 불경을 필사하는 사람이고요. 저는 사서삼경 같은 건 딱 질색인 사람입니다. ... 시골 삶에 대한 애정, 자급자족하며 소박하게 사는 것,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고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 등등에 대해선 같은 취향과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316)

박홍규답게 산다는 것은

이제까지 대화를 통해서도 드러났지만 과연 지식인의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박홍규는 내게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는 선배로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박홍규다운 말이다.

“그간 이런저런 경로로 많은 분이 저에게 정치를 권하기도 했는데요. 저는 그런 건 단호하게 거절했어요. 해서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요. 그렇지만 글을 쓰고 말을 하는 건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명색이 학자이자 교수로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내가 생각을 한다는 것을 밝혀두고 싶고,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을 보여주고 싶고, 이런 식으로 다양하게 생각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사회가 중요하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 아마 그게 가장 저답게 살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 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함으로써 많은 사람이 자기다운 생각과 표현을 할 수 있도록 시시하나마 표본이 되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에요.”(320-321)

비폭력에 대해

박홍규의 인간론에 있어서 비폭력은 무엇보다 중요한 키워드다. 그가 왜 톨스토이와 간디를 좋아했고 그들에 대한 책을 썼을까.

“...제가 평생에 걸쳐 간디와 톨스토이를 정말 좋아하지 않습니까? 제가 그 어떤 사상가가 예술가보다 그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 두 사람이 보여준 철두철미한 비폭력이에요. 그들을 읽을 때마다 저는 제가 겪었던 대한민국 사회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실감하곤 했으니까요. 대한민국 사회는 폭력에 중독된 사회입니다. 아주 폭력이 만연한 사회죠. 제 이야기를 하자면, 저는 뭐 아주 어릴 적부터 부모에게도 맞았고, 학교 선생님들한테도 맞았고, 군대에서는 심지어 고막이 나갈 정도로 맞았으니까요.”(337)

 

 

 

 

비폭력론은 언어 문제로 연결된다. 우리의 차별적 언어생활은 폭력으로 나아가는 도화선이기 때문이다.

“저는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항상 이들(학생)에게도 말을 높입니다. 그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에요. 나 스스로가 폭력적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는 것일 뿐이죠. ... 제가 타인에게 말을 높이는 건 저 자신이 정해둔 일종의 ‘룰’인 것이죠.”(345)

“...상호 평등한 경어 사용이 모든 사람에게 일상화되거나, 아니면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적어도 회화 언어로는 반드시 경어를 쓰는 사회가 되었으면 해요. 그게 아니라면 구어와 문어가 일치되어 아예 모든 사람이 평어를 쓰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347)

철학의 아버지라도 비판받을 것은 있다

언젠가 박교수의 그리스 철학 비판서 <플라톤 다시보기>를 읽으면서 새로운 관점을 발견했다.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라고 말하면서 그의 철인 정치철학을 찬양해 온 사람들에겐 뜨끔한 내용이었다. 플라톤이 제시한 이상국가라는 것이 결국 전체주의 국가를 옹호하는 이론이고, 박정희 독재를 정당화시켜주는 논거로도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저도 스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갖는 깊이와 중요성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철학자들이 그 시대의 주류 계급을 두둔하고, 노예제를 옹호했으며,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합리화하고 정당화시켰다는 측면에 주목했던 거예요. 왜냐면, 그리스철학을 중시하는 많은 사람이 이런 점에 대해서 아예 외면하거나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경향이 너무나도 큰 게 사실이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 서양의 주류 철학에는 사실상 매우 비민주적인 전통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중세의 권력화된 기독교를 거부한 흐름이든지, 근대에 들어서선 스피노자 몽테뉴로 이어지는 자유롭고 능동적인 철학적 전통 그리고 볼테르와 디드로 등의 계몽주의자들에게 주목했던 것입니다. ... 저는 그 반대의 흐름을 가장 집대성한 두 인물을 톨스토이와 간디로 보고 있는 것이죠.”(358-359)

박교수의 비폭력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러시아 문학에서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중에서 톨스토이를 선택한 이유로 넘어간다. 이 부분도 박홍규의 삶을 이야기할 때 빠트리기 어려운 부분이다.

“...이 책(부활)은 차르 체제의 권력과 빌붙었던 러시아 정교를 철두철미하게 비판하고, 성경 속에 포함된 신비주의적인 요소도 철두철미 배격하고, 기독교의 삼위일체설과 원죄설, 대속사상 같은 것들을 완벽하게 거부하는 책입니다. ...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둘(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과 사상을 근본적으로 구분 짓는 문제는 대속사상을 인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것이라 봅니다. ... 도스토예프스키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조시마 장로가 상징하듯 현실 종교의 권위를 인정하고 타율적인 입장을 취하는 대속주의자죠. ... 도스토예프스키는 좀 심하게 말하면 러시아 군국주의자였고 차르주의자였습니다. 러시아 정교의 사도였고요.”(360-362)

박홍규도 해결하지 못한 성의 문제

인간론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성의 문제’이다. 아무리 삶 전체를 구도자적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극복하기 힘든 문제는 역시 ‘성’(sex)이다. 사람에겐 식욕만큼이나 강렬한 욕망이 성적 욕구다. 이 욕구를 어떻게 통제하면서 살아가야 할까.

"... 수많은 주간지와 값싼 성인물들이 제게 이중적인 분열과 모순을 불러일으키고, 성적인 호기심 같은 것도 끊임없이 불러일으켰던 거죠. 그래서 그에 대한 커다란 죄의식 같은 게 있었어요. 성적인 의미에서의 여러 고민이 있었고, 자위행위를 끊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도 컸고요. 좀 심각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인가 자살을 시도했던 적이 있었을 만큼요. ... 이성을 향한 성적인 관심을 끊지 못하는 걸 끊임없이 자기 책임과 의지박약 같은 것으로 연결 짓곤 했던 거죠. ... 성적인 음란물에 중독되고 그걸 끊지 못하는 데서 오는 좌절이나 자학 같은 것을 충분히 경험했습니다.”(377-380)

성에 관해 폐쇄적인 우리 사회가 박홍규의 젊은 시절을 강타한 것이다. 우리에게 어떤 것이 진정한 성적 해방일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성적 욕망을 해결하면서 사회의 평화를 이루어낼 수 있을까.

"...저는 평생 한 남자 한 여자, 이런 신념은 믿지 않습니다. 하나의 사랑만을 지켜야 한다고도 생각한 적이 없고요. 다만 여러 사람을 만나되 어떤 만남에 대해서든 진지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을 뿐입니다. 아주 당당하게 사랑하고 당당하게 헤어져라. 헤어지고 난 뒤에 미련을 갖지 말라. ... 제발 싫다는 사람 따라다니지 말고, 괴롭히지도 말고,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 같은 것 좀 믿지 말라. ...(382-383)

페미니즘 그리고 성평등

미투 운동이나 페미니즘 운동이 우리 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이 때, 이런 말은 매우 미묘하나, 대담은 이성간의 신체접촉에 대해서도 말을 이어간다.

"신체 접촉은 인간관계의 친밀도를 표현한다는 점에선 대단히 자연스런 현상일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우리 사회는 친밀도를 표현하는 정도가 딱 정해진 연인 관계의 시기에만 가능한 사회라고 봐도 좋을지 모르겠어요. 그렇지 않은 시기에 친밀도를 과시하게 되면 범죄가 되어버리는 아주 비극적인 사회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 저는 페미니즘의 흐름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지만, 페미니즘 운동이 이런 이성 간의 자연스러운 접촉의 욕망 자체를 너무 과도하게 억압한다든지, 위험사회와 위협사회의 공포 같은 걸 불필요하게 조장한다든지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398-399)

"우리는 인간에 관하여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돌아가야 할 가장 기본적인 생각, 혹은 명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이며, ‘모든 남성과 여성은 평등하고, 또 마땅히 평등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 여성이 여성이고 남성이 남성이라는 이유로 인하여 생활상의 어떤 차원에서도 차별이 있어선 안 됩니다. 물론 두 성에는 생물학적 구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물학적인 구분이 어떤 이유로든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차별로는 절대 이어지면 안 되는 것이지요.“(407-409)

박홍규가 남긴 마지막 말

이제 긴 대담은 끝났다. 그가 들려준 70 평생, 그것은 담담하면서도 애절하고 때론 감동 그 자체였다. 그는 비주류로 살아왔지만, 집요한 독서와 저술로서 많은 장애물을 뛰어 넘었다. 지방에 살면서 서울중심의 한국 사회를 비판했고, 진보 보수를 가르지 않고 패거리 문화를 비판했고, 언제나 비폭력의 관점에서 평화로운 한국사회를 염원했다. 그는 이제 남은 삶을 어떻게 살까? 독자의 관심사이겠지만, 그의 마지막 말은 실로 평범한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이 오히려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간디의 삶과 생각처럼,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언제나, 모두 책에서 찾았던 것 같다. 나는 죽을 때까지 내내 읽다가 늙어갈 것이다. ... 읽어야 할 단 한 권의 책이 남아 있는 한, 반드시 써야 할 단 한 줄의 문장이 남아 있는 한 나는 내내 읽고 또 쓸 것이다. 내일 죽어도 여한이 남지 않게 살 것이다.“(460)

박홍규 교수님과 사모님 서현숙 선생님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다. 이 책의 대담을 이끌고 멋진 책으로 정리한 젊은 작가 박지원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2019. 1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