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고독과 슬픔

영원한 나라로 가신 내 삶의 표상 겸산 최영도 변호사

박찬운 교수 2018. 6. 12. 11:16

영원한 나라로 가신 내 삶의 표상 겸산 최영도 변호사


최영도 변호사(1938-2018)


어제(토요일) 오후 적막한 연구실로 걸려 온 한 통의 전화가 제 평정심을 와르르 무너뜨렸습니다. 겸산 최영도 변호사께서 세상을 뜨셨습니다. 비통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변호사님은 제 삶의 표상이셨습니다. 황망한 마음이지만 먼 길 떠나시는 변호사님을 추모하며 이곳에 몇 자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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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산 최영도 변호사(1938-2018, 이하 ‘선생’이라 호칭함, 이것은 존경의 염을 담아 부르는 경칭임). 모르는 분들에게 선생을 어떻게 설명하는 게 좋을까요. 5년 전 출판된 문명기행기 <문명과의 대화>(네잎클로버) 서문에서 제가 선생께 드린 감사의 말씀을 옮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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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을 쓰게 되는 데는 적잖게 주변 도움이 컸다. 우선 법률가로서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지난 20년간 큰 깨달음을 주신 최영도 변호사님께 감사를 드린다. 최 변호사님은 국가인권위원장을 역임하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원로 인권변호사이시다. 그분은 법률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인문학적 소양이 넘치는 분으로 일찍이 사라져가는 옛 토기를 모아 아낌없이 국가에 기증했고, 틈만 있으면 세계 곳곳을 여행하시어 그것을 글로 남기신 분이다. 내게 항상 여행과 인생에 대해 말씀해 주시고, 글을 써 주변과 나누라고 권면해 주신 분이기도 하다.“(<문명과의 대화>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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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회장과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역임한 인권변호사이자 시민운동가이고, 세계문명 발상지를 답사하고, 음악과 미술에 조예가 깊은 문명여행가이자 예술 감상가이며, 자신의 경험을 품격 있는 글로 옮겨온 저술가입니다. 저와는 지난 20년간 특별한 인연으로 맺어진 선후배 사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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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가가 된 이후 몇몇 선배 법률가가 저의 롤 모델이 되었지만 선생만큼 제게 큰 영향을 끼친 분은 없습니다. 비록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나 법률가가 되었지만 선생같이 고상한 풍모를 지닌 법률가로 성장하고 싶었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면 참을 수 없는 연민으로 밤을 새우면서도, 또 한편으론 예술을 알고, 문명의 발상지를 찾아 세상을 주유하는 멋진 여행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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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자기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면이 있는 사람에게 끌리는 법입니다. 제가 선생을 좋아하고 따르게 된 데에는 분명 선생과 제겐 무언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일 겁니다. 그게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호기심입니다. 선생은 연세 팔순이 되어서도 끊임없이 지식을 찾아 밤을 새우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글로 옮기셨습니다. 호기심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 또한 그렇기에, 이처럼 새벽을 깨워 책을 읽고, 그것을 정리해 글을 씁니다. 선생이 쓰신 책 한 권을 읽으면 저도 언젠가 이런 책을 쓰겠다고 결심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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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1973년 사법파동 후 폭압적인 박정희 정권에 의해 법관재임용에서 탈락한 뒤, 재야로 나와, 조준희, 홍성우 변호사님 등과 함께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날리셨습니다. 강직한 품성으로 불의에 결코 발을 딛지 않으시고 법률가의 본분은 인권옹호와 정의실천이라고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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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제가 선생에게서 오로지 법률가의 모습만 보았다면 이렇게까지 선생을 따르지 못했을 겁니다. 선생은 법률가의 틀을 뛰어넘어 전인적 삶을 살아온 분입니다. 참된 지식인이라 함은 자신의 전공 외에 인간과 자연 그리고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와 정열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런 지식인은 자신의 생업과 관련된 공부 외에 문학, 역사, 철학, 예술을 공부합니다. 제가 아는 한 선생은 법조계에서, 아니 우리 사회 전체에서, 이런 정열을 누구보다 많이 갖고 사셨습니다. 법조 후배들에게 부족한 인문학적 향기를 물씬 풍겨주신 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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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것은 선생의 남다른 어린 시절과 청장년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겁니다. 선생의 선친께선 장충동에 하늘로 솟은 기와집을 지으시고, 방에는 13폭 병풍을 치시고, 백단향을 피운 채 다도를 즐기신 분이라고 합니다. 선생은 그 아버님을 따라 코 흘리개 시절부터 국전 관람을 하였고, 큰 아버지 제자인 최순우 선생이 있는 국립박물관을 무상출입하였다고 합니다. 보성학교에선 간송 전형필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고, 대학시절엔 클래식과 독서에 특별한 취미를 붙이셨습니다. 판사시절 야나기 무네요시의 책을 만나 석불사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다음 지난 40년 간 불교미술에 심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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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이 나라 최고의 토기 수집가였습니다. 30년간 수집한 토기 1700여점을 국립박물관에 기증해 누구나 그것을 즐겨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독자 여러분, 시간이 있으시면 용산박물관에 가셔서 특별기증관 내에 있는 겸산 최영도관을 찾아 주십시오. 선생이 수집한 귀한 토기 문화재를 직접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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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미술품 감상가, 클래식 음악 애호가였습니다. 이에 관해 아름다운 책 두 권을 내셨는데,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는 미술관에 관한 책이고, ‘참, 듣기 좋은 음악’은 클래식에 관한 책입니다. 선생은 빼어난 문명여행 답사가이기도 했습니다. 세계 곳곳의 문명 발상지를 틈만 나면 다녔고 그것을 글로 옮기셨습니다. 작년 말 출판하신 800쪽의 ‘아잔타에서 석불사까지’가 바로 그 결정판입니다. 타클라마칸 사막에선 혜초 스님이 되었고, 둔황에선 소설 돈황의 주인공 조행덕이 되어 아름다운 명사산과 월아천을 뒤로 한 채 막고굴의 불교미술을 탐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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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하겠습니다. 선생은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이십니다. 법조인 중 최고의 기억력 소유자로 소문났던 고 유현석 변호사님에 버금가는 기억력이라고 후배들은 말합니다. 다녀오신 곳의 지명, 읽으신 책의 도서명과 저자 그리고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시는 것에서 후배들은 늘 감탄과 함께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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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산 최영도란 분은 바로 이런 분입니다. 인권변호사로서 엄혹한 시절을 거쳐 오면서도 인간의 품격을 최고도로 발휘한 분입니다. 제게 품격 있는 법조인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신 진정한 스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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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도 변호사님, 사랑합니다!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십시오! 그 뜻 계속 받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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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6. 10.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찬운




2018. 6. 12. 자 한겨레 신문


[가신이의 발자취] 겸산 최영도 변호사의 영면을 기원하며


지난 2017년 12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겸산 최영도(오른쪽) 변호사의 저서 <아잔타에서 석불사까지> 출간 축하모임에서 박찬운(왼쪽) 교수가 진행을 맡았다. 여러 역작을 펴낸 겸산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간기념회를 하면서 박 교수에게 직접 사회를 부탁했다. 사진 박찬운 교수 제공
지난 2017년 12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겸산 최영도(오른쪽) 변호사의 저서 <아잔타에서 석불사까지> 출간 축하모임에서 박찬운(왼쪽) 교수가 진행을 맡았다. 여러 역작을 펴낸 겸산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간기념회를 하면서 박 교수에게 직접 사회를 부탁했다. 사진 박찬운 교수 제공


지난 9일 토요일 오후 적막한 연구실로 걸려 온 한 통의 전화가 제 평상심을 와르르 무너뜨렸습니다. 겸산 최영도 변호사께서 갑자기 세상을 뜨셨습니다. 변호사님은 1990년대 초반 민변에서 처음 인연을 맺은 이래 제 인생의 길잡이였습니다. 아니, 이 시대 모든 법조인의 표상이었습니다. 황망한 마음을 감출 수 없지만 오늘 먼 길 떠나신 변호사님을 추모하며 이곳에 몇 자 적습니다.

변호사님은 1970년대 초 폭압적인 박정희 정권에 의해 법관 재임용에서 탈락한 뒤, 재야 법조인이 되어 인권변호사로 외길을 걸으셨습니다. 민변 회장과 대한변협 인권위원장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면서 인권옹호에 앞장섰고,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맡아서 인권문제를 시민운동의 지평으로 확장시켰습니다. 국가인권위 시절엔 저도 인권정책국장을 맡아 함께 힘을 보탰습니다.

그러나 변호사님의 삶을 법률가로만 한정할 수 없습니다. 변호사님은 법률가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전인적 지식인의 풍모를 한껏 발휘한 분입니다. 참된 지식인이라 함은 자신의 주업에 함몰되지 않고 인간과 자연 그리고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와 정열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런 지식인은 생업과 관련된 공부만이 아니라 문학·역사·철학·예술을 공부합니다. 제가 아는 변호사님은 법조계에서, 아니 우리 사회 전체에서, 그런 향학열을 누구보다 뜨겁게 품고 사셨습니다. 후배 법조인들에게 부족한 인문학적 향기를 물씬 풍겨주신 분이었습니다.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함께 일하던 시절. 왼쪽부터 박찬운 인권정책국장, 최영도 인권위원장, 곽노현 사무총장.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함께 일하던 시절. 왼쪽부터 박찬운 인권정책국장, 최영도 인권위원장, 곽노현 사무총장.

아마 이것은 변호사님의 남다른 어린 시절과 청장년 시절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변호사님은 코흘리개 시절부터 ‘국전’ 관람을 하였고, 국립박물관을 무상출입하였다고 합니다. 보성학교에선 간송 전형필 선생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우리 문화재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습니다. 판사 시절 일본의 민속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책을 통해 ‘한국 제1의 불교미술’ 경주 석굴암을 만난 다음 40년 이상 국내외의 불교유적을 답사했습니다.

변호사님은 이 나라 최고의 토기 수집가로서 돈이 생길 때마다 아낌없이 투자해, 사라져 가는 토기를 모았고, 그 전량 1700여점을 국가에 기증했습니다. 용산중앙박물관에 있는 ‘겸산 최영도관’을 찾아주십시오. 변호사님이 수집한 귀한 토기 문화재를 직접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겁니다. 변호사님의 미술과 음악 감상은 전문가 수준을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변호사님이 쓴 두 권의 책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와 <참, 듣기 좋은 음악>은 미술과 음악에 얼마나 조예가 깊은 지를 알려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변호사님은 자타공인 문명여행가였습니다. 세계 곳곳의 문명 발상지를 틈만 나면 직접 발로 밟았고 그것을 유려한 글로 남겼습니다. 지난해 말 출판한 800쪽의 책 <아잔타에서 석불사까지>(기파랑 펴냄)가 바로 그 결정판입니다. 타클라마칸 사막에선 혜초 스님이 되었고, 둔황에선 소설 돈황의 주인공 조행덕이 되어, 아름다운 명사산과 월아천을 뒤로 한 채, 불교미술의 보고 막고굴을 탐사했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을 보면 참을 수 없는 연민으로 밤을 새우고, 또 한편으론 예술을 알고, 문명 발상지를 찾아 세상을 주유한 이가 바로 최영도 변호사님입니다. 법조인들에게 품격 있는 지식인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신 진정한 스승이었습니다. 그분이 오늘 우리 곁을 떠납니다. 변호사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부디 영면 하소서! 당신의 삶 기억하고 또 기억하겠습니다!


박찬운/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