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고독과 슬픔

은사 차용석 교수님을 추모하며

박찬운 교수 2018. 2. 26. 05:19

은사 차용석 교수님을 추모하며

나는 대학시절 모범생(진짜!)이긴 했지만 은사님들 보시기엔 결코 예쁜 제자는 아니었다. 강의 능력도 없으면서 강의실에 들어오는 분은 내 밥이었고,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으면서 거들먹거리는 분은 결코 교수로 인정한 법이 없었다. 한마디로 당돌하고 건방진 제자였다. 그래서 인지 세월이 한참 지나서까지도 은사님들 사이에선 나를 꽤나 별난 놈으로 여기시는 것 같았다. 이 부족한 제자를 용서하소서!

그런 기억 속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내가 존경에 마지않는 한 분이 계시다. 형사법을 가르치신 석우 차용석 교수님이시다. 학계에서는 호불호가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 마음 속엔 그분만한 분이 없었다. 우선 선생은 선천적으로 훌륭한 풍모를 가지고 계셨다. 누가 보아도 선생에게선 대학자의 풍채와 아우라가 품어져 나왔다
내가 처음 선생을 뵌 게 1981년이니 선생 나이 49세 때다. 그런데도 뿔테 안경을 쓰고 허연 백발을 휘날리면서 강의를 하시는 게 완전 권위 있는 노교수의 모습이었다. 말씀 하나하나 허투루 하시는 게 없었고, 생각은 오대양 육대주를 날라 다니셨다. 당시 티브이에선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란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었는데, 그 주인공 킹스필드 교수가 선생과 비슷하다고 해서, 우린 선생을 차스필드라고 부르곤 했다.

그 시절 선생은 지금 내 나이보다 7-8세나 어린 나이였었는데.... 그 연세에 차스필드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였으니, 우리 제자들 사이에서 그 분의 학자로서의 존경심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나는 왜 교수 생활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젠 나이도 찰만큼 찼는데... 선생님 앞에 서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형사법학계에서의 선생의 업적은 적지 않다. 형법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국가주의에 흐르지 않도록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는 데 깊은 관심을 가졌다. 도덕과 법의 관계에선 항상 긴장을 유지하면서, 법률의 도덕화를 경계하셨다.
선생의 형소법에서의 업적은 더 인상적이다. 학자로서 선생을 기억하는 분들은 누구나 선생을 우리 형사법에 ’헌법적 형사소송‘(Constitutional Criminal Procedure)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전파하신 분으로 알 것이다. 형사소송법을 헌법의 기본권(특히 신체의 자유)을 실천하는 수단으로 인식하고, 그 해석 적용에 헌법적 사고를 강조하셨다. 물론 이런 사고는 60년 대 이후 영미에서 이미 널리 퍼진 형사법의 해석론이긴 했지만 선생이 그 선두에 서서 전파해 온 것을 부인할 수 없다.

95년으로 기억하는 데, 일본에서 세계변호사회와 일본변호사연합회 공동주최로 개최된 국제 심포지엄에 참가하였다. 매우 큰 행사였기에 일본 법학계의 거두들이 다수 참석했다. 저녁 만찬장에 갔더니, 동경대 총장을 역임한 형사법계의 전설이라 불리는 히라노 류이치 선생이 스피치를 하고 있었다. 히라노는 전후 일본의 형사법에서 ’헌법적 형사소송‘을 역설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날 나는 이런 말을 그에게 했다. “저는 선생을 대학시절부터 알고 있습니다. 선생의 헌법적 형사소송은 저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이 바로 저의 은사 차용석 교수님이십니다."

석우 차용석 박사님은 한국 전쟁 시기에 경북대를 다니시고, 거기에서 학자의 길을 걷다가, 내 모교 한양대 법대엔 1977년 선생 나이 44세에 부임하셨다. 유학파도 아니고, 서울의 주요대학 출신도 아님에도, 출중한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미국 및 일본의 여러 대학에서 연구하시면서, 선진 정보를 입수해 학문의 토대를 굳건히 하셨다. 감히 말하건대 그분의 실력과 인격에 대해 토를 다는 이들은 없을 거라고 본다.

선생은 나의 황량했던 대학시절의 단비였을 뿐만 아니라, 대학졸업 이후 30년 이상, 학자로서의 롤 모델이었다. 바로 그 분 석우 차용석 박사님이 오늘 소천하셨다. 향년 86세. 선생의 명복을 빈다.

오늘 저녁 선생의 영전에 향불을 올리고 큰 절로 작별을 고하고자 한다.

부음 소식을 듣고 슬픔 마음에 두서없는 글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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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후 2022년 2월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후배 최용성 변호사가 차용석 교수님을 추억하는 글을 법률전문지에 실었다. 이글과 함께 보면 좋을 것 같아 여기에 올린다.

최용성(차교수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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