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3층에 올라가면 중앙아시아관이 있다. 이곳에 갈 때마다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유물들이 서울 한복판까지 와 있을까. 이 유물들은 중국령 중앙아시아, 곧 타클라마칸 사막을 둘러싸고 있는 오아시스 도시 유적에서 온 것이다. 둔황, 트루판, 쿠차, 호탄 등등. 우리나라 고고학탐사단이 거기까지 가서 발굴한 것도 아닐 테고, 우리 박물관이 그 많은 돈을 들여 어딘가에서 사들였을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이 유물들을 박물관에 기증을 했다는 말인가. 전시실 어디에도 이런 의문을 풀어줄 설명문은 붙어있지 않다.
중국령 중앙아시아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중심으로 그 남쪽으론 곤륜산맥, 서쪽으론 파미르 고원, 북쪽으론 천산산맥으로 둘러싸였고, 북동쪽으론 고비사막으로 이어진다. 이곳은 현재 중국의 신장위구르자치구를 말하는 데, 자그만치 면적이 160만 평방킬로미터로, 중국 전체 면적의 6분의 1을 차지한다. 과거 실크로드 시절, 이 지역은 둔황을 출발하여 천산산맥 남쪽의 서역북로와 곤륜산맥 북쪽의 서역남로에 의해, 동서문명이 교류된 교착지였다.
중앙아시아는 종교적으로 여러 종교가 각축을 벌린 곳이며, 특히 불교전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이다. 인도에서 발원된 불교는 중국으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황량한 사막을 넘어오면서 많은 변형이 이루어졌다. 간다라 미술의 흔적이 이곳 타클라마칸 오아시스 도시 유적 곳곳에서 발견되며, 서구 기독교 네스토리우스, 마니교, 나아가 유대교의 흔적까지 발견된다. 서기 8세기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곳은 이슬람세력이 지배했으므로 그 문화 또한 깊다.
중앙박물관이 이곳 중앙아시아 유물을 소장하게 된 사정은 이렇다. 이것은 한 일본인의 중앙아시아 탐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13년 전 일본에서 중앙아시아 탐사단이 떠난다. 바로 오타니 백작이 보낸 탐사단이다. 오타니는 일본 불교 정토진종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매우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19세기 말 유럽을 장기간 여행했으며, 당시 일본인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영국 왕립지리학회의 회원이기도 했다.
19세기 유럽에선 고고학이 선풍적 인기를 끈다. 이집트 상형문자가 해독되고 나일강 곳곳이 서구인에 의해 발굴되었다. 그것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관심지역은 메소포타미아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 다음은 어디였을까? 현재 중국령 중앙아시아였다. 이곳은 일찍이 영국과 러시아가 각축을 벌리는 곳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통해 이곳 접근이 용이했고, 영국은 인도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카라코람 산맥을 넘으면 바로 이곳에 당도할 수 있었다. 당시 청나라는 외세의 간섭과 내정 불안으로 이곳에 제대로 된 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부 서구의 고고학팀들은 이곳에 들어와 중국정부의 별다른 간섭 없이 각종 발굴을 통해 막대한 유물을 유럽으로 가져간다. 누군가는 이들을 실크로드의 악마들이라 표현했다. 스웨덴의 스벤 헤딘은 맨 먼저 이곳에 나타나 다량의 유물을 가지고 갔다. 그가 사라지자 다음엔 영국의 스타인과 독일의 르콕이 이 넓은 지역을 휘젓고 다녔다. 수많은 유물이 당나귀와 낙타에 태워져 카람코람을 넘어 인도를 거쳐 런던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모스크바를 거쳐 베를린으로 옮겨졌다. 프랑스의 펠리오는 늦게 이 대열에 끼어들었지만 탁월한 능력으로 둔황 막고굴에서 최대의 대어를 낚았다.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도 이 때 그가 파리로 가져간 것이다. 이들 대열에 일본인 오타니 백작도 낀 것이다.
오타니는 1902년부터 1914년까지 3차례의 탐사단을 이곳에 보내, 서구제국의 고고학 탐사단과의 경쟁에서 결코 지지 않고, 각종 불교유물을 모았다. 스타인과 펠리오가 둔황에 이미 도착하여 보물이란 보물은 다 들고 갔을 것 같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것들이 많았다. 그것들을 모아 쓸어왔고, 트루판, 호탄 등에서도 꽤 쓸 만한 유물을 건졌다.
그런데 갑자기 오타니에게 재정적 문제가 발생하여 이 보물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약3분의 1정도의 컬렉션이 경성박물관으로 오게 된다. 들리는 말로는 당시 어느 일본 사업가가 조선에서 채광권을 따기 위해 조건부로 오타니에게서 입수한 이 유물을 총독부에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방, 이 유물은 자연스럽게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어 받게 된다.
앞으로 기회가 있을 때 실크로드 서역남로와 북로의 이야기를 몇 번 할 것이다. 오늘은 그저 맛보기라 생각하기 바란다. 중앙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몇 장을 올린다. 다음에 이곳에 가면 위 이야기를 상기하면서 찬찬히 유물을 관람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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