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고독과 슬픔

정(情)의 대가

박찬운 교수 2017. 2. 16. 20:13

()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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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가 좀 우울합니다. 몇 시간 전 우리 법과대학 마지막 졸업식에 참석한 이후 계속 저기압 상태입니다. 우울할 땐 수다가 약이라던데...저녁밥 먹고 열 일 제치고 수다를 떨어볼까 합니다.

 

제 페친 중엔 교수나 교사 분들이 여럿 있습니다. 이 수다는 그분들이 들으면 딱인데, 아마 다른 분들도 듣다보면 조금은 공감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어떤 친구에게 정을 듬뿍 주어 본 일이 있는가요? 정이란 것은 특별히 대가를 바라고 주고받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지만 그렇게 정을 준 친구로부터 서운한 일을 당하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기분 나쁘지요? 선생들에겐 이런 일이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종종 일어난답니다. 여러 학생을 지도해도 유난히 정이 가는 친구가 따로 있거든요.

 

작년 졸업식 때니 꼭 1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졸업식장에서 한 친구를 찾고 있었습니다. 단상에 올라가 있었기 때문에 졸업생들을 전부 볼 수가 있었거든요. 저는 그 친구를 계속 찾았습니다.

 

이상한데... 왜 걔가 안 보이지. 오늘 같은 날 걔가 오지 않을 리가 없는데... 오늘 걔와 사진 한 장을 꼭 찍어야 하는데...” 이렇게 계속 혼잣말을 하였지요. 그런데 그 친구는 졸업식이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친구가 누구냐고요? 프라이버시가 있으니 누구라곤 말할 수 없습니다. 직업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 친구는 젊은 시절 꿈을 꾸었던 직장에서 지금 일 잘하고 있을 겁니다.

 

왜 제가 그 친구를 그토록 기다렸냐고요? 그건 짐작하듯이 제가 그 친구에게 정성을 많이 쏟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친구를 만난 것은, 11년 전 첫 강의 때였습니다. 교실 맨 앞에서 제 강의를 경청하고 수업이 끝나면 꼭 남아서 저에게 질문을 하던 친구였지요. 아주 뛰어난 친구였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를 한 번 상담해 보니 집안사정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방출신으로 고군분투하면서 공부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그 때부터 이 친구를 좀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특별히 챙겼습니다.

 

이 친구 이야기를 다 쓰려면 사실 소설 한권은 나올 것 같아요. 이 친구는 집안 사정으로 결국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2학년을 마친 상태였는데... 저도 옆에서 보기 참 딱했습니다. 하지만 이 친구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공부했고, 비록 학교에선 제적되었지만 몇 년 후 그가 원하는 꿈을 이루었습니다.

 

꿈을 이룬 그날 저는 이 친구를 강남의 고급호텔로 초청해서 따뜻하게 격려했지요. “K, 결코 가난했다는 것이 네 앞을 가로막아선 안 된다. 가난했다는 것이 네 얼굴에 나타나면 안 된다.” 뭐 이런 말도 해주고요.

 

그 후에도 그에겐 또 하나의 난관이 있었습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갔지만 대학 중퇴 학력은 그에겐 큰 핸디캡이었어요. 제가 그것을 알고 그에게 마저 학업을 마치라고 권했습니다. 그 친구는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하겠다고 제 앞에서 약속을 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인 4년 전 어느 날 제가 스웨덴에 있을 때 카톡 하나를 받았습니다. “선생님 저는 법대를 졸업하지 못할 운명인 모양입니다. 법대에서 등록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는 그 문자를 받고 바로 학교에 연락을 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로스쿨로 인해 법대가 곧 종료되는 데 이 친구가 너무 늦게 등록을 하는 바람에 법대 졸업이 어렵다는 겁니다.

 

이 친구를 구제하기 위해선 교수회의 등의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어떻게 합니까? 동료 교수님께도 협조를 구했지요. 이렇게 훌륭한 친구를 법대 졸업을 시키지 않으면 안 되지 않느냐고 하면서요. 마침 다른 교수님들도 잘 협조해 주셔서 무난히 등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친구는 그 후 2년간 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물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직장 다니랴 학교에 와서 공부하랴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를 포함해서 여러 분들이 그 친구의 무사 졸업을 위해 힘이 되어 주었지요. 그렇다고 부정한 일은 절대 없었습니다. 정유라를 연상하면 안 됩니다. ㅎㅎ.

 

그렇게 해서 마침내 학업을 마치고 작년 이맘때 쯤 졸업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그가 끝내 나타나지 않은 겁니다.

 

여러분,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는 그날 너무 기분이 우울했습니다. 그냥 넘어갈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전화 한 통을 그 친구에게 했습니다. 그 친구가 황급히 받더군요.

 

“K, 오늘 왜 안 나왔니. 나는 너를 보기 위해 아침부터 기다렸는데... 너와 사진 한 장을 꼭 찍고 싶었단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제가 일이 많아서...”

 

저는 그 소리를 듣고 더 이상 말을 않고 조용히 수화기를 놓았습니다. 제 입에선 이런 말이 흘러 나왔습니다.

 

정을 주지 말자. 내가 너무 정을 주었구나. 졸업식에 나오지 못할 수도 있는 일인데... 졸업식에 그 친구만 안 온 게 아닌데... 내가 쓸데없이 과도하게 정을 주었구나.”

 

오늘 졸업식, 그 친구가 다시 생각나는군요.

 

아마 제 마음을 미처 몰랐을 겁니다. 제가 이렇게 서운한 마음을 갖고 있는 줄을 몰랐을 겁니다. 아마 그게 꼰대 선생과 젊은이의 차이겠지요.

 

여러분도 이런 경험이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