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민변

제11화 소록도의 기적

박찬운 교수 2016. 2. 20. 10:19

나와 민변(11)

 

 

11화 소록도의 기적

ㅡ한일 변호사들의 소록도 보상소송을 기록하다ㅡ

 

 

이제 시리즈 <나와 민변>이 거의 종착역에 다 달았습니다. 11화 한센인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에 비해 훨씬 깁니다. 자그마치 200자 원고지 80매에 가깝습니다. 사실 이것은 삽시간에 써진 것이 아닙니다. 지난 10년 간 조금씩 정리해 둔 것을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하는 것입니다. 이 기록은 제 개인적으로나, 한센인들에게나, 아니 우리들 모두에게나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기록은 저 아니면 누구도 기록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정리했습니다


독자 여러분, 한센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아시나요? 그것은 차별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차별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 이 글을 보면서 잠시 생각해 보지 않겠습니까?

 

  

기적

생각해 보면 기적이다. 12년 전 내가 이 일에 뛰어 들었을 때만해도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한국의 한센인 581명이 일본 정부로부터 과거 일제 강점기 시절 소록도에 강제격리 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보상을 받은 것이다.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일본이 자신의 식민지 통치과정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하여 피식민 국가의 국민들에게 자국법에 근거하여 보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현실화되었다. 그러니 기적이라 말하는 것이다.

 



2004년 5월 4일 나는 소록도에 첫 발을 디뎠다. 사진은 소록도에 들어가기 전 녹동항에서. 12년 전인데... 지금 거울을 보면서 이 사진을 보니... 나도 늙어가는구나!



소록도와의 운명적 만남

12년 전 200454, 나는 광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소록도를 가는 길이었다. 이 열차를 타기까지 나는 많은 번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바로 전 해, 그러니까 2003년 가을부터 지인인 한 일본 변호사로부터 소록도 소송의 합류를 요청받고 있었다. 그는 후쿠오카의 오츠카 후사노리 변호사였다. 나는 1994년 후쿠오카 변호사회의 당번변호사(이것은 수사단계에서 피의자가 체포되었을 때 변호사회 소속의 변호사가 달려가 조력해 주는 제도이다. 일본 변호사회의 대표적 법률부조제도로 1990년에 최초로 시작되었다. 한국의 당직변호사 제도는 바로 이 제도를 본 받아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후쿠오카 변호사회는 이 제도를 선도한 변호사회다) 3주년 기념식에 초청되었는데, 오츠카 변호사는 당시 인권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고흥군 녹동항에서 바라본 소록도


그 뒤 10여 년 간 줄곧 나는 오츠카 변호사와 개인적 교유관계를 맺어 왔고 그 덕에 몇 번이나 후쿠오카 변호사회 인권위원회에 옵저버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런 그가 소록도 이야기를 하면서 내게 한국 변호사들을 규합하여 함께 일본에서 보상 소송을 하자는 제안을 해 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한 귀로 듣고 또 한 귀로 흘리는 날을 몇 달간 지속했다. 사건의 속성상 한 번 발을 디디면 빠져 나오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던 것이다.

 

인권사건을 자주 접해본 사람으로 보통 이런 사건은 초기 단계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만 세월이 지나면 소리 없이 꼬리를 내리기 마련이다. 나는 그런 것이 싫었다. 그리고 소록도라는 곳의 거리가 너무나 멀었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소록도라는 마음의 거리가 너무나 멀었던 것이다. 한센병, 아니 나병, 문둥병이 내게는 피안의 일이지, 내 일로 생각이 안 들었던 것이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어릴 때부터 들어 온 한센병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2004년 5월 4일 첫 소록도 방문 시 오츠카 변호사(필자 오른쪽)과 소록도 자치회 임원들과 함께.


그런 일을 함께 하자니 피할 수밖에. 그런데 해가 바뀌어 오츠카 변호사는 또 한 사람의 일본인을 사이에 두고 내게 접근을 해 왔다. 모토무라 시게모리씨. 이 사람 역시 1994년 후쿠오카 변호사회의 행사에서 처음 만났는데 당시 통역자였다. 워낙 한국말을 잘해 그 내력을 물어 보았던 인물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중학교를 나온 뒤 일본인 부모를 따라 일본으로 돌아간 사람인데, 자신은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한국인으로만 알고 지냈다고 한다.

 

모토무라씨와 나는 후쿠오카 행사 이후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한국에 올 때마다 내 사무실을 들르거나 집을 방문했고 그런 인연으로 나의 후쿠오카 방문도 잦아졌다. 그런 모토무라씨를 가운데에 넣어 오츠카 변호사는 지속적으로 나의 소록도 보상소송 합류를 바라고 있었다. 이런 요구에도 나는 적극적인 자세로 나오기 힘들었다. 고작 광주의 변호사들과 일본 변호사들을 연결해 주는 것으로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광주에서 일하는 민경한, 이상갑 변호사 등이 일본 변호단과 합류하여 소록도를 방문하기 시작한 것은 이렇게 내 역할도 있었던 것이다.




 

소록도 첫 방문 시 모토무라 씨와 함께


그러다가 20044월말, 모토무라씨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한 달 뒤 일본의 변호사 15명과 구마모토 현민 방송국 관계자가 소록도를 방문하는데, 그 선발대로 자신과 오츠카 변호사 그리고 현민 방송국의 기자 한 사람이 일본의 골든 위크(4월말부터 5월초, 일본의 황금연휴)에 맞추어 소록도를 방문한다고 하면서, 한번 같이 가자고 간곡히 부탁하는 것이었다. 이 때 만큼은 더 이상 변명거리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일본인들의 이런 권유에 약간은 부끄러움이 올라오고 있었다. 모토무라씨는 결국 인권이란 가치를 누구보다 귀한 가치로 여기면서 산다고 하는 한국 한 변호사의 자존심을 크게 자극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나는 200454일 생애 최초로 소록도를 방문하였다. 12일의 소록도 방문은 내게 크나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자치회 분들, 병력자이신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병원 관계자를 만난 그날 밤 금산(거문도)이 보이는 화이트 하우스(소록도에 있는 조그만 카페)에서 오츠카 변호사와 모토무라씨와 환담을 나누었다. 단 몇 시간이지만 나는 변해 있었고 무엇인가 이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 하자, 이들과 함께 소록도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자. 이들이 하늘나라로 가는 날 천상병 시인의 말마따나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해보자.

 

56일 나는 서울로 오는 열차 안에서 가지고 간 노트북을 켜고 부지런히 보고서를 작성했다. 대한변협 인권위에 보내는 것이었다. 이 보고서에는 나는 일본변호단의 요청사항을 정리하고 소록도 상황을 개관하였다. 그리고 말미에 소록도소송변호단을 만들어 이를 변협차원에서 지원하고 나아가 변협에서 한센인의 인권보호에 앞장설 것을 제안하였다. 이를 위해 변협 인권위에 한센병인권소위원회를 만들 것도 제안하였다. 그리고 말미에 이런 말을 넣었다.


우리는 과연 소외된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는가,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소록도의 환자와 같이 내 몸속에 한센균이 침범하였다 하자, 다행히도 빨리 치료하였더니 아무런 증상도 없이 완쾌되었다. 그런데 사회는 나병환자, 문둥병 환자라 하면서 나를 절해고도로 가라한다. 나의 인생,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나의 가족, 나의 사랑하는 아들 딸, 그들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며칠 뒤 변협 인권위는 이러한 제안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아마도 이는 당시 변협 회장인 박재승 변호사와 인권위원장이었던 박영립 변호사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변협은 나의 보고서를 그대로 수락하면서 새롭게 생기는 한센병인권소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볼 것을 제안하였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고 당연히 내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었다.

 

한국 변호단 결성

20045월 변협 내에 한센병인권소위원회가 만들어지자 변협 차원의 소록도 보상소송 지원은 급물결을 탔다. 소위가 우선 할 일은 변협 인권위 관계자들에게 소록도 문제, 나아가 한국의 한센병 문제를 바로 알리는 일이었다. 변호사간에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으면 이런 일은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소위는 일련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한센병 인권활동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병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2004년 7월 변협 한센인권소위원회는 일본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쿠마모토를 방문했다. 당시 일본 변호단과 회의하는 장면


이를 위해 이 분야 국내 최고 권위자인 가톨릭 의과대학의 채규태 박사를 모셨다. 한센인들이 지난 한 세기 어떻게 차별을 받아 왔는지도 알아야 했다. 한센복지협회 관계자를 모셔 그들이 살아 온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한 달 뒤 20047월 드디어 우리 인권위 변호사들은 저주의 땅, 소록도로 향했다. 2004710일 저녁 전남 고흥군 소록도 원생 자치회 사무실. 한센병력자단체인 한빛복지협회의 임두성 회장이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연신 닦으며 지난 세월 한센병력자들이 겪어 온 차별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 옆에서 이를 듣고 있던 박영립 변호사도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참석한 인권위원 모두 울었다. 우리는 죄인이었다우리는 그 차별이라는 범죄의 공범이었다.




2004년 7월 나는 변협 한센인권소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위원들을 안내해 소록도를 방문했다. 소록도 근처 오마도에서 박영립, 차규근, 장철우, 장완익 변호사와 함께

 

내친김에 일본의 사정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소위 주요 관계자들이 일본을 방문하였다. 2004716. 한국 변호단 7명의 변호사(박영립, 박찬운, 장철우, 이상갑, 민경한, 차규근, 장완익 변호사를 말한다. 한 동안 우리 7명의 변호사들은 일본 변호사들로부터 ‘7인의 무사라는 별칭을 들었다. 의협심 강한 사무라이 7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7인의 무사를 빗댄 것이다)는 쿠마모토를 방문하여 그곳에서 일본 변호단과 해후한 후 일본 변호단이 그동안 해 왔던 한센인 소송의 경과를 들었고 한센인 격리시설이었던 케이후엔을 함께 방문하였다


그곳에는 2001년 쿠마모토 판결(이 판결은 과거 일본 정부의 정책에 의해 강제격리 당했던 일본 한센인들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한 것으로서 쿠마모토 지방재판소에서 승소한 사건을 말함) 의 주인공들 다수가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권리란 역시 당사자의 깨어 있는 각성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한센인을 도와 줄 수 있어도 권리를 종국적으로 쟁취하느냐 여부는 당사자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겪어 가면서 소록도 한국 변호단은 결성되었다. 전국 변호사들에게 호소문이 만들어져 전국 변호사들에게 배포되었다. 적지 않은 변호사들이 뜻을 함께 하겠다고 연락해 왔다. 우선 변호사들 30여 명으로 한국 변호단을 결성하였다. 한국변호단의 단장은 당시 변협 인권위원장인 박영립 변호사가, 사무국장격인 간사는 인권위 부위원장인 내가 맡게 되었다


리 변호단은 바로 일본 변호단과 함께 소송을 위한 자료 조사에 들어갔다. 한일 변호단은 7월말부터 소록도를 들락날락 하면서 공동 진술서 작성 작업을 했다. 일본 변호단은 일본 각처에서 소록도로 왔고, 한국 변호단은 대부분 서울에서 소록도로 향했다. 지금보다 훨씬 교통사정이 좋지 않은 때라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이 작업은 2006년 소록도 소송 1심이 끝나고 일본 보상법이 개정된 이후 더욱 잦아졌다. 한일 변호단이 만든 소록도 기적은 이렇게 만들어져 갔던 것이다. 

 

역사적인 한센병인권보고대회

소록도 보상소송의 초기 전개과정에서 잊을 수 없는 사건은 한센병인권보고대회였다. 한센병인권소위는 이것을 당시 대한변협 협회장인 박재승 변호사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준비하였다. 20041011일 오후 3시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 객석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전국의 한센인 400여명이 객석과 복도를 점령하였고 일본 변호인단도 이 역사적 행사를 목격하였다. 이것은 유래 없는 사건이었다. 이날 행사는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20041012일 자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냈다.

 



한센병 인권보고대회 2004년 9월 11일 사진 동아일보



“11일 오후 3시 대한변호사협회(회장 박재승·朴在承) 인권위원회 주최로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한센병(나병) 인권 보고대회는 시종일관 숙연한 분위기였다. 행사장 복도에까지 빼곡하게 자리 잡은 한센병 환자 400여명은 한센병 환자 자활단체인 한빛복지협회 임두성 회장의 차별실태 보고를 들으며 눈가를 훔쳤다. 한센병 환자들이 대외적인 공개행사를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국의 한센인들 수백 명이 서울에서, 그것도 대한민국 정치 1번지 국회에 운집하여 자신들의 지난 날 삶을 놓고 이야기해 본 것은 정부 수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날 한빛복지협회는 한센인의 눈을 통해 지난 한 세기 동안 이 땅에서 벌어진 한센인들에 대한 차별을 고발하였다


나는 한센병과 인권이라는 주제로 그 동안의 실태를 고발하면서 그 대안을 모색하였다. 장완익 변호사는 한센인들이 겪은 과거사 중 주요 인권침해를 고발하였다. 오마도 간척사업이 드디어 도마에 올려 졌고 그 피해자인 한센인들에게 보상의 길을 모색하였다. 장철우, 차규근 변호사는 일본에서의 한센병 소송 경과를 소개하면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역설하였다


이 행사는 단순한 행사가 아니었다이 행사를 기점으로 한센인들은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로 결심하였다. 자신들의 문제를 자신들의 목소리로 해결해야 한다는 결기를 다지게 되었다. 이 행사는 한센인들이 우리나라의 소수자 인권문제 중에서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대상임으로 분명하게 부각시켰다. 그로 말미암아 각 정당에서도 한센인 문제는 하나의 어젠다가 되었다. 이것은 2008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으로 하여금 한센복지협회의 임두성 회장을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로 지명하는 일로 연결된다. 한 마디로 한센인이 이 사회의 당당한 주역으로 나서는 데, 이 보고대회는 하나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한센병 인권보고대회 초청장>


한센병이 무엇인지요. 이 병이야말로 차별의 대명사입니다. 질병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차별은 시작되었고, 완치된 사람마저 이 사회로 극심한 차별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그럼에도 이들 한센병 환자들과 병력자들은 우리 정부에 이제껏 그 들의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한 맺힌 목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목소리를 냄으로써 오히려 더 큰 차별이 올 것이라는 두려움과 그러한 행동이 행여 2세에까지 미칠까 하는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이 분들에 대한 과거의 인권침해를 아는 순간,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학적으로 아무런 정당한 이유 없이 단종 수술이 가해지고, 재활촌을 만든다는 희망으로 온 몸으로 돌과 흙을 날라 바다를 막았지만 한 뼘의 땅도 얻지 못했던 오마도 간척사업의 비극 등등.


언제까지 우리가 이 분들의 고통을 그대로 두고 보아야만 합니까. 저희 대한변협은 이 분들의 눈물을 닦아 드리기 위해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지난 5월 변협 인권위원회는 위원회 산하에 한센병인권소위원회를 설치하여 한센병인권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 조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소록도를 수시로 방문하여 과거의 한센병 환자에 대한 인권침해를 조사하였고, 병력자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눈물어린 증언을 들었습니다. 나아가 일본에서 최근 이루어지고 있는 한센병 관련 소송과 특별 입법 등을 면밀히 검토하였습니다.


이런 연구 결과를 금번 한센병인권보고대회라는 형식의 행사로 쏟아 낼 생각입니다. 이 행사를 통해 저희 변협은 그동안의 연구 조사 결과를 대내외에 알리고 한센병 인권문제의 대책을 촉구할 것입니다. 부디 참석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이 문제가 조속한 시일 내에 해결되어 한센병 환자 및 병력자들이 더 이상 차별 속에서 살지 않도록 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2004. 9.

 

대한변호사협회 협회장 박재승

 


2004년 9월 국회에서 열린 변협 주최 한센병 인권보고대회의 초청장. 이 내용을 보면 당시 변협이 한센인 인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2004년 10월 동경에서 보상소송이 시작되었다. 첫 날 우리 변호단은 원고들과 함께 일본변호사 회관에서 법정까지 도보 행진을 했다. 사진 서울신문



소송이 시작되다

20041025일 동경지방재판소 103호 대법정. 100여명의 방청객이 역사적인 소송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변협 한센병인권소위 위원들도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이름하여 소록도보상소송 제1회 변론기일이 열리고 있었다. 200312월부터 3회에 걸쳐 일제 시대 소록도에 강제수용되었던 소록도 한센병 병력자들이 후생노동성에 일본 정부가 2001년에 만든 한센병보상법에 입각하여 보상금을 지급할 것을 청구한 것에 대해 2003816일 기각하자 청구인들이 동경지방재판소에 그 기각처분을 취소하라는 소송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일본 변호단은 위 소송 준비를 위해 1년간 8차례에 걸쳐 소록도를 방문하여 한국변호단과 함께 원고들의 진술을 청취하여 진술서를 작성하는 작업을 하였다. 1025일의 제1회 변론기일은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는 판단 아래 한국 변호단은 변협의 적극적 지원 아래 한센병인권소위 위원 전원(박영립, 박찬운, 장철우, 장완익, 민경한, 이상갑, 박종강)이 참석하였다. 물론 당사자인 소록도의 원고들 중 몇 분의 할아버지와 한센병력자단체인 사단법인 한빛복지협회의 관계자 들이 참석하였다. 게다가 KBS MBC의 방송관계자들도 동행 취재를 하는 등 안팎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1025일 아침 일변연 회관에서 모인 양국 변호인단은 당일의 재판 전략을 논의하고 향후의 소송 진행 방향에 대해 격의 없는 토론을 벌렸다. 오후 1시 변호사회관 앞은 약 200여명의 시민과 변호사 그리고 원고들이 모였다. 휠체어를 탄 원고들을 앞장세운 채 동경지방재판소까지 약300미터의 행진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중요사건에서 하는 소위 입정행동이 시작된 것이다. 매스컴의 기자들이 모여들어 연신 사진을 찍고 노상에서 인터뷰를 하는 방식으로 법정까지 걸어갔다. 짧은 시간이지만 매우 효과적인 시위라고 생각되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승소를 다짐하는 결의대회이기도 하였다.


오후 130분 재판장과 배석판사가 입정하자 바로 재판이 시작되었고 원고 강우석 할아버지(80)의 의견진술이 내 통역으로 시작되었다. 내가 당사자 의견 진술의 통역을 맡은 것은 일본어를 통역할 수 있을 정도로 잘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한일 변호단은 이 역사적 사건에서 양국 변호단이 함께 소송을 진행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한국 변호사들은 일본에서 소송대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내가 통역 신분으로 법대 앞에 나간 것이다. 이로 인해 나는 법정에서 일본 변호사들과 함께 앉았는데, 이런 일은 유례없는 일이었다.

 

80세가 넘은 원고가 천천히 그러나 힘 있는 목소리로 1940년대의 소록도 생활을 이야기하자 법정은 이내 숙연해졌다(나는 통역을 하면서 그 감정까지 통역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강 할아버지의 진술 중 소록도 생활 당시 다리를 잘라 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진술하고 절단된 다리부분을 보여주자 방청객들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이어서 장기진 할아버지(84)의 의견진술이 있었는데 장 할아버지는 소록도 생활 중 손은 모두 절단하였고, 단종 수술까지 당했다고 당시의 상황을 고발하였다. 이 진술에 방청객 중 일부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하였다.

 

첫 기일에서 내 기억을 사로잡은 인사는 도쿠다 야스유키 변호사였다. 그는 자신이 소송에 참여하게 된 것은 일본의 한센병요양소에 격리수용된 한 환자의 편지였다고 밝혔다. 편지에는나예방법과 같은 세계에 전례가 없는 악법을 이렇게 오랜 세월에 걸쳐 존속된 것에 대해서 당연히 인권에 대해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을 변호사회가 침묵한 채 과연 이대로 두는 것이 좋은가? 라는 질책이 있었다고 소개하였다. 그러면서 편지는 "침묵은 지지다라고 쓰여 있었는데 도쿠다 변호사는 이 편지를 읽을 때 무엇인가 전신을 뚫고 지나가는 전율을 느꼈다고 소회하였다.

 

한국에서 간 우리 변호사들 모두도 그 말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1회 기일은 흥분 속에 끝났다. 참고로 도쿠다 변호사에 대해서 말하면, 그는 2001년 쿠마모토 한센병 소송을 승리로 이끈 변호단의 단장이었다. 이번 소록도 일본변호단의 고문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분에 대한 일본 변호사들의 존경심은 대단하였다. 겸손함과 성실함 그리고 따뜻한 마음씨는 그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존경의 마음을 표한다.

 

소송의 시작은 한국 한센인 인권 역사의 한 장을 여는 출발점이었다. 2004년의 소송은 2005년 어처구니없는 패소로 이어졌으나 이것은 바로 보상법 개정 운동으로 이어졌다. 어쩜 문제의 본질적 해결을 위해서는 전화위복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보상법의 개정, 이어진 양국 변호단의 보상신청절차. 상황은 이렇게 연결되면서 소록도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에 변화가 오고 나아가 전국 80여개의 정착촌 사람들의 의식에 새 변화가 온다. 절대적으로 고립된 이들에게 마침내 봄이 오고야 만 것이다. 이 모든 변화에서 보상소송은 첫 출발이었다.

 



2009년 3월 소록도에서 보상소송 보고대회를 열었다. 이 때 한일 변호단이 한 자리에 모여 기념촬영을 했다. 첫 줄 왼쪽부터 도쿠다, 박영립, 쿠니무네, 김성기 변호사.



잊을 수 없는 일본 변호단

소록도 보상소송을 하면서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보다도 일본 변호사들을 잊을 수 없다. 단장인 쿠니무네 나오코 변호사, 고문격인 도쿠다 야스유키 변호사, 실무 전위대인 스츠키아츠시 변호사 등등. 이들은 도쿄에서 저 가고시마까지 일본 전역에서 모여든 변호사들이었다. 이 분들에 대하여 꼭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일본 변호사들의 일하는 방법이라고나 할까, 서로 존중하며 선후배 동료 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는 모습들이었다. 너무나 멋지고 감동적인 것이었다. 그러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어려운 사건, 앞이 보이지 않는 사건을 그렇게 오래 동안 함께 할 수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소록도 보상소송 일본변호단, 가운데 도쿠다 변호사(좌)와 쿠니무네 변호사(우)



나는 처음에 일본 변호단의 단장이 쿠니무네 변호사가 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우리식으로 보면 쿠니무네 변호사는 도쿠다 변호사에 변하여 변호사 경력이나 지명도에 있어 비교가 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다가가기에는 인상도 매우 차가웠다. 나는 내심 부드럽고 가만히 있어도 존경심이 우러나오는 도쿠다 변호사가 일본 측 대표를 맡으면 우리와 소통도 잘 되리라 생각하였는데, 예상이 빗나가자 한 동안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내 생각은 쿠니무네 변호사를 너무 몰랐던 것에서 오는 기우였다.

 

그녀는 한 마디로 탱크와 같은 여자였다. 하나의 목표를 세운 다음 그것을 위해 인생을 바치는 전형적인 사무라이였다. 어렸을 때부터 소수자, 약자에 대한 연민을 느껴온 그녀는 뒤늦게 변호사가 되었다. 그리고 변호사가 되자마자 물을 만난 듯 그 뜻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80년대 중반 변호사가 된 이후 이날까지 그녀는 오로지 소수자, 약자를 위한 일해 온 사람이다.




2007년 4월 타이베이에서 열린 한중일의 한센인 인권 심포지엄을 마치고 3국 변호사들과의 만찬, 중앙 박영립 변호사, 필자 우측으로 도쿠다 변호사, 좌측으로 쿠니무네 변호사

 

한센인과의 인연은 그녀에게는 운명이었다. 한센인 보상소송을 하면서 알게 된 한센인 출신 가수 미야사토 신이치와 결혼한 사연은 하나의 소설이다. 미야사토씨가 세상에 나와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20015월 일본 수상 관저 앞에서 노래한 ‘5월의 거리가 더욱 감동적인 것은 그 뒤에 쿠니무네 변호사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그녀이기에 일본의 동료 변호사들은 한결 같이 그녀를 마치 야쿠자의 보스같이 여겼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대선배 격인 도쿠다 변호사를 섬기면서 변호단을 이끌었다. 보스로서의 단장이 아니라 온갖 허드렛일을 감당하는 어머니 같은 역할을 감당했다고나 할까.

 

일본 변호사들은 그들이 서로를 지극히 존경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 주었고, 그것은 우리 한국 변호사들에게 감동으로 다가왔다. 나를 포함하여 한국 사람들은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면 나서려하지 않고, 또 주인공 아닌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이런 공익 활동을 하는 변호사 세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일본 변호단의 활동 하나하나는 새로운 것이었다. 보상소송 1차 변론기일이 끝나고 저녁 시간에 한일 변호단은 동경의 한 음식점에 모여 단합을 과시하였다.

 



2007년 4월 타이베이 한중일 한센인 인권 심포지엄을 마치고 당시 타이베이 시내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해 대만 시민들을 격려를 하는 모습


그 때 우리를 감동케 한 것은 쿠니무네 변호사와 도쿠다 변호사가 후배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헌사였다. 법정에서 변론한 선배 변호사들에 대한 헌사가 아니라 그날 한국에서 온 할아버지, 할머니를 호텔에서 법정으로, 법정에서 호텔로 안내한 어느 젊은 변호사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그날 법정에서 당사자신문을 할 때 당사자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발이 되면서 자료를 옆에서 넘겨준 어느 여자 변호사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이들의 헌신적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 변론기일을 제대로 치러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며 박수를 유도하였다. 가슴 뭉클한 순간이었다.

 

이러한 일본 변호사들의 동료애는 우리 한국 변호단에게 강력한 메시지가 되었다. 나의 기억으로는 변호사 생활 20년 동안 한국의 변호사들이 이런 공익 사건에서 이 만큼의 단결 력을 과시한 적이 없다. 참여한 변호사 모두가 묵묵히 일했고 서로를 격려했다. 우리에게는 쿠니무네 변호사 대신에 박영립 변호사가 있었고, 도쿠다 변호사 대신에 김성기 변호사가 있었다. 그리고 스츠키 변호사 대신에 이영기, 박종강, 이정일 변호사 등이 있었다


확언하건대, 소록도 보상소송은 우리나라 변호사들의 인권활동 역사 중 획을 긋는 사건이다. 그것은 참여 변호사들의 조직력과 헌신성에서 다른 어떤 사건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결과가 일본 변호사와의 동료적 연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뜻깊은 일이다.

 

숨은 공로자

소록도 소송 초기 단계에서 잊을 수 없는 분이 한 분 더 있다. 그 분은 타키오 에이지 선생으로 히로시마의 인권연구가이다. 내가 이 분을 알게 된 것은 20048월 이 분이 동아일보를 방문하여 저서인 소록도갱생원강제수용환자의 피해사실과 그 책임소재라는 책의 한국어본을 기증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동아일보 기자와 함께 만났던 것에서 연유한다.

 



다키오 에이지, 소록도를 30회 이상 다니면서 한센인의 강제격리 역사를 조사했다.  나는 2004년 8월 동아일보에 그를 소개하고 인터뷰를 주선했다. 사진 동아일보.


이 분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살아 있는 한국 한센인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의 한센인 역사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한센인 역사에 관해서까지 모든 자료를 모으고 있었다. 2004년 당시 이미 10년간 매년 3회씩 소록도를 방문하여 그곳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 일제 강점기의 소록도 역사를 일일이 채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선생이 저술한 책만해도 조선한센병사’ ‘식민지하 조선에서의 한센병 자료집성등 수종이 나와 있었다.

 

나는 선생을 통해 일본인을 다시 보았다. 일본인은 참으로 이중적이다. 한 쪽에서는 열심히 인권을 침해하고 다른 나라를 무자비하게 침략하지만 또 한 쪽에서는 이렇게 평생을 다른 나라의 인권을 위해 헌신한다. 알 수 없는 민족이다. 그렇지만 이들이 있기에 한일관계는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오늘 소록도 소송이 가능했던 것도 선생과 같은 이가 일본에서 온갖 자료를 모아왔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선생은 소록도 보상소송의 보이지 않는 주인공이었다.

 

하여튼 나는 선생을 통해 일본에 한국의 한센인 문제를 심도 있게 전할 수 있었다. 위에서 본대로 200410월 국회 한센인인권보고대회에서 발표한 내 글이 일본의 잡지에 실릴 수 있게 된 것도 선생의 힘이었고, 더욱 일본 진보 잡지의 대표격인 세계에서까지 한국의 한센인 문제가 다루어진 것도 전적으로 선생의 힘이었다


선생은 200410월 소록도 소송 1회 기일이 있은 다음 날 세계의 편집실이 있는 이와나미서점 출판사의 본사 건물로 나를 초대하였다. 그곳에서 나와 선생 그리고 도쿠다 변호사가 함께 출연하여 3인 대담을 진행하면서 소록도 소송의 의미를 짚어 보았다(이 대담은 세계’ 20055월호에 실렸다). 나로서는 개인적으로 대단히 영광스런 자리였다.

 

국가인권위원회 시절

나는 소록도 보상소상 2차 변론기일이 있었던 20041217일 이후 이 작업에서 조금씩 멀어져 갔다. 그렇지만 이 기간 중 놓쳐서는 안 되는 일이 하나 있다. 한일 양국에서 벌어진 시민대상 서명운동이다. 소록도 보상소송이 갖는 의미를 양국의 시민사회에 알리고 그 지지를 재판부에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양국 변호단이 갖게 된 것이다. 처음에 우리는 양국에서 100만 명을 서명을 받아 재판부에 제출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변호사회에 호소하고, 교육기관과 종교계에 호소하였다. 계획대로 되어가지는 않았지만 양국 변호단은 최선을 다했다. 10개월 동안 양국 변호단의 노력으로 얻은 결과는 일본에서 13만여 명, 한국에서 11만여 명의 시민이 이 서명에 참여하였다. 기대에는 못미쳤지만 재판부에 양국 시민사회의 관심을 전달하는 데에는 부족한 숫자는 아니었다. 사실 이것만도 적지 않은 결실이었다.

 



2009년 3월 소록도에서 보상소송 보고대회를 하면서 경과를 보고하는 조영선 변호사


2005년 초 나는 변호사 생활을 잠시 접고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20052월 인권위의 인권정책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소록도 보상소송을 시작한 사람으로 실무에서 손을 뗀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고 동료들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나의 후임자라고 할 수 있는 조영선 변호사가 합류하는 계기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조변호사는 법조 경력이 일천하였지만 또 다른 탱크였다. 한 번 결심한 것은 어떻게 해서라도 실천하는 의지의 인간이었고 부지런했다. 그리고 이 사회의 약자에 대하여 무한한 연민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집안의 내력인 모양이다(조변호사는 80년대부터 노동운동을 하며 글을 써온 노동자 시인 조영관 시인(1957-2007)의 친 동생이다.).

 

거기에 오하나 간사가 합류하였다. 오간사는 사회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학창시절부터 사회의 소수자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아주 헌신적인 사람이다. 이들 두 사람의 합류로 한국 변호단의 실무력은 초기보다 훨씬 강화되었다. 나로서는 감사한 일이었다.

 



2005년 나는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정책국장이 되자마자 한센인 인권실태조사를 실시했다. 이 실태조사는 우리나라의 한센인 인권상황을 종합적으로 조사하고 인권증진 방안을 보고하는 것으로 후일 인권위의 한센인 인권 정책권고에 큰 영향을 끼쳤다.


변호단 활동을 함께 하지 못하였지만 나의 역할은 끝나지 않았다. 국가인권위원회라는 새로운 장을 활용하여 한센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미친 것이다. 나는 인권정책국장에 임명되자마자 한센인 인권문제를 인권위의 주요과제 중 하나로 설정하였다


당시 조영황 위원장은 이것을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었다(아마도 조위원장이 이 문제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그의 고향이 전남 고흥이라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될 것이다. 그의 고향 앞바다에 소록도가 있었으니 어려서부터 조위원장은 한센인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인권위원들과 함께 한센인 정착촌을 방문하여 한센인들의 지난한 삶을 직접 청취하였다.




나는 국가인권위원회 조영황 위원장과 상임위원들을 안내해 2005. 6. 29. 소록도를 방문했다. 사진을 그곳 만령당 앞에서 한많은 삶을 살다가 먼저 간 한센인을 추모하는 장면. 조위원장은 소록도 방문에서 "그동안 국가는 무관심했으며, 저는 국가기관의 책임자의 한사람으로서 진심으로 그리고 정중히 국가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데 대하여 여러분께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함께 드린다"라는 발언을 하였다.

 

2006629일에는 조위원장이 소록도를 직접 방문하기까지 하였다. 여기에서 조위원장은 건국 이후 최초로 국가기관의 장으로서 머리 숙여 한센인들에게 사과하고 국가의 책임을 언급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권위는 2005년 인권상황실태조사 용역 사업으로 한센인 인권 분야를 채택하여 대대적인 조사작업에 들어갔다. 이 용역사업은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 출범 이후 가장 큰 사업이었다. 통상 한 건당 3, 4천만 원의 용역 비용이 들어가는 데, 이 사업은 1억 원이 배정되었다.

 

이 작업에는 소록도보상소송 한국 변호단이 대거 참여하여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인권위는 일본 변호사들도 초청하여 일본의 한센인 문제도 다시 조명하고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20066월 한센인 인권상황 개선을 위한 종합적인 권고로 나타났다


이 권고에서는 한센인의 질곡의 삶을 그대로 지적하고 그 개선을 위해 정부의 획기적인 결단을 촉구하였다. 이 권고는 앞으로도 한센인 인권증진을 위한 하나의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하리라 생각한다. 나는 바로 이 한 가운데에 있었고, 그 모든 과정에 참여하였다. 변호사로서, 인권 전문가로서 그 이상의 보람은 없었다.


(2016. 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