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천불천탑 미얀마

천불천탑의 나라 미얀마를 가다(1)

박찬운 교수 2016. 1. 15. 05:52

천불천탑의 나라 미얀마를 가다(1)

 

미얀마 여행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바간에서 필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순간 내 머리를 스치는 생각. 죽어도 여한이 없다. 많은 것을 이룬 것은 아니다. 그래도 열심히 읽었고 썼다. 열심히 공부했고 나름 일정한 성과도 거두었다. 사랑했고 사랑받았다. 이제 이 숨 막히는 광경을 보았으니 지금 죽는다 해서 무엇이 두려우랴.

 

바간 한가운데 퇴락한 이름 모를 수도원 옥상에서 본 낙조 속의 파고다들은 그리도 아름다웠다.

 

아침 일찍 인레호수를 보트로 타고 건너가면서 본 고기 잡는 인따족 어부들을 볼 때 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




네이 툰 나잉, 그는 내게 미얀마의 인권과 정치를 알려주었다.


 

미얀마, 과거 버마라고 불리던 이 나라가 내 관심 한 가운데로 들어온 것은 두 사람을 만나면서부터다. 한 사람, 네이 툰 나잉(Nay Tun Naiing). 16년 전 내게 난민으로 온 사람이다. 나는 그의 대리인이었고 지원자였다. 그는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았고 그의 조국 미얀마를 위해 헌신하다 작년 갑자기 사망했다. 나는 그의 장례식장에서 눈물의 조사를 읽었다. 잘 가라, 내 친구 네이 툰 나잉! 그는 내게 미얀마의 정치와 인권현실에 대해 알려주었다. 아웅산 수지 여사가 이끄는 NLD(버마민주민족동맹)에 대해서 안 것도 그를 통해서다.




뉘안 조, 그는 내게 미얀마인들의 삶에 대해 알려주었다.


 

또 한 사람, 뉘안 조(Nyan Zaw). 나는 그를 4년 전 스웨덴 라울 발렌베리 인권연구소에서 만났다. 나와 그는 같은 사무실에서 3개월 동안 우정을 나누었다. 그는 미얀마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이다(최근 미얀마는 국가인권위원회법을 제정해 인권위원은 차관급 대우를 받고 있다). 미얀마 주요 종족 중 하나인 몬족의 유명인사로 전직 의사다. 몬족이 다수종족인 몬주에서 가장 큰 병원의 병원장을 지낸 인물이다. 나는 그를 인권을 통해 만났지만 그 이상의 관계를 만들어 왔다. 그를 통해 미얀마 전체를 알았고 미얀마엔 버마족 이외에도 여러 종족(ethnic group)이 있음을 알았다. 무엇보다 그는 내게 미얀마인의 삶의 자세를 알려주었다.

 

이번 미얀마 방문은 내겐 두 번째다. 2년 전 가족과 함께 방문해 양곤을 중심으로 그 주변을 돌았고 뉘안씨의 집이 있는 몬주의 몰람양(모울메인)까지 다녀왔다. 당시 나는 미얀마 최대의 사원 쉐다곤(양곤), 미안마 3대보물인 짜익티요 등을 둘러보았지만 사정상 심층적으로 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당시 제일 아쉬웠던 것은 세계 3대 불교성지로 꼽히는 바간을 가지 못한 것이었다. 그 때 나는 뉘안씨와 약속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올테니 바간을 같이 돌자고. 이번 방문은 그렇게 해서 꽤 오래 전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16일 북한에서 수소폭탄 실험이 있었다. 갑자기 한반도에 긴장의 먹구름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구랍 28일엔 느닷없이 한일 양국정부가 일본군위안부 합의를 하고 말았다. 나는 6회에 걸쳐 그 부당성에 대한 글을 썼고 신문 인터뷰에 응했다. 머리가 복잡했다. 여행을 가야하는가, 포기해야 하는가


그러나 나는 그런 상황을 뒤로 미루고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미안했다. 많은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로 분노하고 전쟁의 공포에서 신음할 때 나홀로 자유를 만끽하며 여행한다는 게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바간으로 가는 내 차림새다. 나는 일주일 동안 미얀마인으로 살았다.




여행 마지막 날 내 모습이다. 마치 산적 같지만 나는 이렇게 자유를 누렸다.

 


하지만 나는 자유를 사랑한다. 잠시라도 나는 모든 걸 잊고 미얀마 한 가운데로 빠져 들어가고 싶었다. 나는 미얀마에 도착해 뉘안씨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나는 그와 그의 친구들 2명과 함께 미얀마 역사상 최고의 통일왕국인 바간왕국의 수도 바간과 미얀마 최고의 경승지 인레를 차로 돌았다. 보통 이 여정을 외국인이 소화하는 것은 항공로를 이용하는 데 우리는 모든 구간을 차로 돌았다. 2천 킬로미터.

 

나는 아예 미얀마 전통복장인 론지로 갈아입었다. 수염도 깎지 않았다. 얼굴에 어떤 것도 바르지 않고 모자도 쓰지 않은 채 다니니 단 며칠 만에 나는 한국인이 아닌 미얀마인이 되어 있었다. 일주일 동안 미얀마인 세 친구는 한국인이, 나는 미얀마인이 되었다. 어딜 가도 우리는 그렇게 소개했다.




바간을 가면서 휴게소에서. 뉘안 옆에 있는 친구가 민 아웅, 내 옆에 있는 친구가 찌 윈.

 


뉘안씨 외 두 친구 중 한 사람은 민 아웅, 그는 미얀마의 일급 화가다. 특히 그는 바간의 파고다와 인레 호수를 소재로 하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무려 20회 이상 바간을 찾은 사람으로 바간의 수많은 사원을 손바닥에 안에 넣은 듯 기억하고 그 구조에 정통해 있는 사람이다. 인레 또한 5회 이상 방문해 그 지역을 잘 안다. 그가 이번 여행의 길잡이 역할을 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찌 윈, 이 사람은 미얀마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운전기사로 일하다가 최근 사직하고 양곤에서 개인택시를 운전하는 사람이다. 미얀마의 그 열악한 도로상황에서도 시속 80킬로미터를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는 최고의 운전기사였다. 그가 우리 네 사람의 생명줄을 잡고 있었다. 특히 우리가 가지고 간 차의 운전석이 오른쪽에 붙어 있어 운전하기가 매우 불편했다. 도로상에서 벌어지는 그 수많은 추월, 그 때마다 내 손엔 땀이 났다.




 

우리들은 18일 일찍 양곤을 떠나 미얀마 유일의 고속도로(양곤-만달레이)를 타고 약 470킬로미터를 달려 메틸라에 도착한 다음 그곳에서 바간으로 들어가는 지방도를 탔다. 7백킬로를 달려 그날 밤 바간에 도착했다. 우리들은 이곳에서 3일을 유숙하고 111일 인레로 향했다. 메틸라를 거쳐 샨주로 들어가는 길은 험악했다. 거리는 약 4백 킬로미터였지만 감각 상 그 두 배 정도는 충분히 되는 길이었다. 이제 나는 본격적으로 바간을 중심으로 한 미얀마 여행기를 쓸 것이다. 내가 받은 감동이 독자들에게 잘 전해지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