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창국 변호사님을 추모하며
비판하고, 저항하고, 자유를 그리며 살다
박찬운(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변호사)
고 김창국 변호사님
캠퍼스에 하얀 벚꽃이 만발했습니다. 계절의 여왕을 완상하던 중 바람이 한 차례 부니 꽃잎이 눈송이처럼 떨어집니다. 그때 한통의 문자. ‘김창국 변호사 별세’. 그 분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백발이 성성하고 날카로운 눈매의 깡마른 노신사. 제가 26년 전 새내기 변호사로 그 분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습니다. 50초로의 중년에게서 느껴지는 일반적인 인상이 아니었습니다. 강력한 포스가 넘쳤고, 자신감이 충만한 분이었습니다.
법조인들 사이에서 고인은 젊은 시절 수재로 통했습니다. 약관 21세에 고시에 합격해 검사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일면에 불과합니다. 만일 고인이 그것에만 만족해 살았다면 오늘 제가 그를 추모하는 이런 글을 쓸 일은 없었을 겁니다. 고인은 비판적 지식인으로, 저항하는 법률가로, 평생 자유를 그리며 살았습니다.
고인은 자타가 공인하는 인권변호사입니다. 전두환 정권 하에서 검찰과 작별하자마자 일반적인 검찰출신 변호사의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의감 넘치는 젊은 후배들과 민변이란 조직을 만듦으로써 이 땅의 인권변호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고 김근태 의원 고문 경관 이근안에 대한 공소유지 변호사로 활동했고, 강기훈 유서대필조작 사건, 보안사 윤석양 이병 양심고백사건 등 굵직한 시국사건의 변호인으로서 활동한 것은 지금도 우리들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고인은 대한변협과 서울변호사회의 회장을 역임하면서 인권변호를 개인적 차원에서 제도화된 차원으로 바꾸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서울변호사회 회장 시절 당시로선 획기적인 법률부조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경찰서에 체포 연행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변호사입니다. 변호사 없이 어떻게 국가권력을 상대로 자기주장을 할 수 있겠습니까. 고인이 만든 당직변호사 제도는 돈이 없어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하는 서민이라도, 전화 한 통만 변호사회에 하면, 대기하고 있는 변호사가 달려가는 것으로, 우리 법조사에 길이 남을 인권제도였습니다.
고인의 활동은 법조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 시민운동가로 이어졌습니다. 1990년 대 참여연대가 만들어지고 아직 그 틀을 잡지 못했을 때 그 공동대표가 되어 오늘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민단체가 될 수 있도록 초석을 닦았습니다.
고인의 삶에서 화룡점점은 15년 전 이 땅에 새로운 인권기구인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되었을 때 그 초대 위원장을 맡은 것입니다. 독립기구를 원치 않는 법무부를 비롯한 권력기관의 갖은 방해를 극복하면서 인권위를 만든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때론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과도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지만, 고인은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갔고, 마침내 국제사회가 경의를 표하는 인권기구를 만들어내고 말았습니다. 독립기구로서의 인권위는 어떤 상황에서도, 할 말은 하는 국가기관이어야 하지만, 작금의 현실을 보더라도 녹녹치 않은 것이었습니다.
베트남 전 이후 최초로 국군을 이라크에 파병할 때 인권위가 이를 정면으로 반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고인은 위원회 성명으로 그 파병은 헌법과 국제법 위반임을 명확히 했습니다.
고인은 역사인식도 분명한 분이었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면서, 우리 현대사에서 역사적 청산작업은 아무리 늦어도 반드시 이뤄내야 한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고인에 대한 추모를 알려진 업적으로만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누구는 말할지 모릅니다. 고인은 다가가기 힘든 분이었다고. 고인을 제대로 모르는 분들이 그의 인상만 보면 그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김창국 변호사님이 1993년 어느 날 나도 모르는 사이 셔터를 눌러 이 사진을 찍어 주었다.
하지만 저는 고인의 그 면도날 같은 날카로움 뒤에 숨어 있는 따뜻한 인간애를 추억합니다. 변호사회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고인은 연신 사진을 찍었습니다. 제가 보관하고 있는 젊은 시절 최고의 사진 몇 장은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입니다.
고인이 아마추어 사진작가였다는 사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자연과 보통사람들의 일상을 찍어 왔다는 사실, 아마 고인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리워할 것입니다.
캠퍼스의 하얀 벚꽃이 오늘따라 유난히 화려합니다. 이 찬란한 봄날 김창국 변호사님은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이제 고인은 완전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빕니다. “이생이 준 굵은 사슬을 모두 끊어 버리고 천국으로 훨훨 날아가소서. 그리고 “나는 자유다”를 외치소서.“
(2016.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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