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고독과 슬픔

두 가지 슬프고도 감사할 일

박찬운 교수 2015. 10. 7. 17:25

두 가지 슬프고도 감사할 일


나는 하루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낸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저녁까지. 그렇다보니 보통 점심, 저녁 두 끼를 학교에서 해결하는 일이 많다.


그런 내게, 최근, 아주 슬픈 일이 발생했다. 아마 나만이 아니고 우리 학교에 다니는 많은 학생과 교직원들도 내 마음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슬픈 일은 모두 내가 자주 다니는 식당에서 일어났다. 하나는 학교 뒤에 있는 동네 밥집이다. 이 밥집은 2년 전 개업을 한 테이블 대여섯 개의 조그만 식당이다. 이곳에서 내가 자주 먹는 음식은 된장찌개 백반. 이 집 된장찌개는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의 손맛을 느낄 수 있어 하루에 두 끼를 먹을 정도였다. 주인 아주머니 올케가 충청도 태안에서 보내오는 된장으로 끓인다는 이 찌개를 먹다보면, 솔직히, 집 밥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입맛이 없을 때는 아주머니가 끓여 주시는 칼국수나 잔치국수를 먹었다. 조개국물에 호박 채를 듬뿍 넣은 국수 한 그릇을 먹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더군다나 이 집 아주머니는 나를 언제나 애뜻하게 대해 주셨다. 갈 때마다 “교수님은 집에서 버림받으신 모양이에요. 우리 집을 하루에 두 번씩이나 오시니” 하시면서 메뉴에 없는 부침개를 만들어 주셨다. 요즘 식당에 혼자 가기가 얼마나 민망한가, 하지만, 이 집만은 그렇지 않았다. 혼자가도 언제나 대우받고, 맛있는 별미까지 만들어 주시니, 내 마음 얼마나 행복했던가.


지난 여름에도 나는 학교에 오면 이 집에 가서 밥을 먹었다. 방학이 끝날 무렵, 그날도 평소처럼 갔더니 문이 닫혀 있었다. 처음엔 휴가를 며칠 다녀오시나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이 가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문이 닫히고 한 달 쯤 되었을 게다. 지난 달 중순, 오랜만에 그 집을 갔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드디어 문을 여셨군 하면서 들어가 자리를 잡았는데, 나를 맞아주는 사람이 달랐다. 젊은 부부. 어찌된 일인가?


그 날 나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아주머니의 죽음. 아주머니는 방학이 끝날 무렵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셨고 곧 뇌출혈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아! 이런 일이. 젊은 부부는 바로 그 식당을 인수한 분들이었다. 나는 요즘도 그 집을 간다. 매일 가는 것은 아니고 ‘가끔’ 가는 것이다. 어제 저녁 모처럼 그 집을 갔다. 아주머니가 반겨주실 것 같은 생각을 하면서 문을 열었는데, 아주머니는 계시지 않았다. 잔치국수를 하나 시켜 먹었지만, 역시 그 맛은 아니었다.


또 다른 식당은 중국집이다. 우리 학교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식당을 모르면 간첩이라고 해도 좋다. 한양각! 이 식당은 우리 학교 주변에선 가장 역사가 긴 중국집이다. 내가 서울에 온 게 정확히 42년 전인 1973년인데, 그 때 무렵, 이 식당이 개업했다. 중고교 시절, 일 년에 한두 번 짜장면 먹어 볼 땐, 꼭 이집엘 갔다. 대학시절 선배들 따라 이 집에 가서 탕수육을 먹어 본 그 맛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이후 이 동네를 떠났다가 20년 만에 돌아와 그 집을 찾았더니 그때가지 건재해 있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지난 몇 년간 나는 동료교수들이나 학생들과 회식을 할 때 이 집을 참 많이 갔다. 그곳에 가서 옛날엔 먹을 수 없었던 탕수육에, 유산슬, 팔보채를 시켜서, 내가 잘 마시는 고량주 한 병 시키면, 모든 게 행복했다. 고량주는 남으면 그곳에서 보관해 줘 언제라도 가면 반주로 마실 수 있었다.


이 집이 지난 방학 문을 닫았다. 여름 더위가 맹위를 떨치는 날, 나는 혼자 이곳을 찾았다. 내가 잘 먹는 간짜장 한 그릇 먹으려고 갔던 것이다. 그런데 문 앞에 휴업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어 며칠 휴가를 간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돌아왔다. 방학이 끝날 무렵 다시 한 번 들렀는데, 이번엔 휴업이란 글자가 폐업이란 글자로 바뀌어 있었다. 아니 이게 뭐야, 누구 맘대로 폐업이야! 사십 몇 년의 역사가 하루아침 날아가 버린 것이다.


아마도 곡절이 있을게다. 그 노주인장도 그 식당을 갑자기 폐업하는 게 쉬웠겠는가. 이제 더 이상 영업을 할 수도 없고, 물려 줄 사람도 마땅치 않고... 아니 또 다른, 더 어려운 사정도 있었을 게다.


그날 폐업으로 나와 수많은 사람들의 40년 역사는 끝났다. 폐업이란 글자를 보는 순간 마음 한 구석이 서서히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이젠 한양각은 내겐 추억이 되었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지난여름 우리 학교 주변에 있는, 소중한 것 둘을 잃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쉽고도 슬픈 일이다. 나로선, 오늘 이 슬픔을 이렇게라도, 표현하는 게 예의가 되리라.


밥집 아주머님, 하늘나라에서 복락을 누리십시오. 저에게 맛있는 밥을 지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곳을 지날 때는 항상 아주머니를 생각하겠습니다.


한양각 노주인장 어르신, 지난 40년간 저희들에게 맛과 즐거운 공간을 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이제 편안히 노후를 즐기십시오. 그곳을 지나칠 때면 노주인장 어르신의 선한 웃음을 기억하겠습니다.(2015. 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