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기쁨

그 때 그 시절, 추위에 대한 기억

박찬운 교수 2018. 1. 25. 20:58

그 때 그 시절, 추위에 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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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에 나갔다가 방금 전에 돌아 왔습니다. 무척 추운 날씨더군요. 코끝이 시렸습니다. 오랜 만에 느껴보는 겨울다운 겨울입니다. 종종 걸음으로 걸어오면서 잠시 그 때 그 시절로 시간 여행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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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충청도 청양이라는 두메산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이니까 1970년 대 초의 일입니다. 당시 추운 겨울의 풍경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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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면 세수를 해야 합니다. 꽤나 하기 싫은 일이지만 눈곱 낀 채로 학교에 갈 순 없으니 안할 순 없는 일이지요. 마당 한 가운데에 지하수 뽐뿌가 있었는데, 한겨울 아침엔 예외 없이, 얼어 있어 물이 안 나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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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 가서 가마솥의 끓는 물을 한 바가지 떠와, 뽐뿌에 붓고 잽싸게 뽐뿌질을 하면, 하얀 김을 내면서 지하수가 뿜어져 나옵니다. 그러면 그 물을 세수 대야에 담고 다시 부엌에 들어가 끓는 물 한 바가지를 가지고 와 거기에 붓습니다. 그리고 나선 미지근해진 물로 재빨리 세수를 하지요. 우리는 그런 세수를 괭이(고양이)세수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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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수를 하고 나면 얼마나 추운지 단 몇 초 만에 머리엔 고드름이 맺힙니다. 세수 대야 물을 마당에 확 뿌리고 걸음아 나살려라 하면서 방안으로 달려 들어가지요. 바로 그 때, 물 묻은 손이 문고리에 닿는 순간! 아 그 기억! 손이 문고리에 쩍! 하면서 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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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 목욕하는 것은 마치 소가 도살장 끌려가는 것만큼이나 싫었습니다. 요즘처럼 따순 물이 나오는 시절이 아니잖습니까. 그렇다고 동네에 대중목욕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탕 속에 들어가 몸을 푹 불릴 수 있는 방법이 없었지요. 그래도 겨우내내 목욕 한번 안하고 지낼 순 없으니, 날 잡아서 거사를 치러야 합니다. 몸에 때를 모았다가 한 번에 벗겨내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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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방법이란 게 이런 겁니다. 부엌 한 가운데에 큰 고무다라를 놓고 뜨거운 물을 붓습니다. 웃통을 벗고 다라 옆에 엉거주춤 앉아, 양 손으로 몸에 물을 바르며(?), 때를 벗겨 냅니다. 맨 마지막엔, 주전자에 남은 물을 부은 다음, 어머니에게 천천히 흘려 달라고 부탁하지요. 그렇게 해서 머리를 감는 겁니다. 이렇게라도 목욕을 하면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아십니까. 며칠간은 개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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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저는 24시간 따순 물이 철철 나오는 아파트에서 삽니다. 그 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천국이나 마찬가지지요. 추운 날 이런 기억을 하면서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이것도 생각해 보니, 행복입니다. 맹추위에 아직 집에 들어가지 못하신 분들... 지내 놓고 보면 지금 이 순간이 길이 남는 추억이 될지 모릅니다. 건강 상하지 않는 한도에서 추위를 즐기시길 바랍니다.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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