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동 법정에 엘리베이터가 생긴 내력에 대하여

오늘 오후 산책을 하다가 오랜만에 서초동 법원 경내를 들어갔습니다. 법원이 집 근처에 있지만 경내를 들어와 본 것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 전 일입니다. 제가 정확히 2004년 말에 변호사 일을 정리했으니 매일 같이 법원을 들락날락한 것이 꼭 20년 전입니다. 강산이 두 번 바뀔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하니 새삼 세월의 빠름에 놀랍니다.
법원 경내를 둘러보니 20년 사이에 나무들이 많이 자랐습니다. 아직 여름이 다 지나가지 않아서인지 마치 울창한 숲속을 거니는 것 같았습니다. 쌍둥이 법원 청사는 여전히 우뚝 서서 아래에 있는 사람들과 조그만 건물들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누군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권위적인 건물이 어느 것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서슴없이 서초동 법원청사를 말할 겁니다. 지금은 일부러 저렇게 만들라고 해도 만들지 못할 겁니다. 군사독재 정권 시기에 만들어진 법원 청사답게 위압적인 면모를 극대화한 건물입니다.
제가 서초동 법원 뒷편의 사법연수원(현재는 일산 소재)에 들어간 해가 1985년이었는데, 그때 법원 공사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1987년 연수원을 졸업하고 군대에 갈 무렵에도 법원은 계속 공사 중이었고, 3년 복무를 마치고 1990년 초 서초동으로 돌아오니 완공되어 있었습니다.

1990년 3월로 기억하는데 처음으로 서초동 법원으로 재판을 하러 갔습니다. 부푼 마음에 법정으로 향했지만 그날 저는 우울하기 그지 없는 하루를 보냈습니다. 법정이 있는 5층까지 숨을 헉헉대며 계단을 올라갔거든요. 세상에! 한국에서 가장 큰, 아니 아시아에서도 최대라는 법원에 엘리베이터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 기분이 나쁜 것은 판사들은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법정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고 속이 뒤집혔던 것이지요. 서초동 법원청사 법정은 아예 설계 당시부터 엘리베이터를 계획하지 않았던 겁니다. 이런 관존민비가 어디에 있습니까?
숨을 돌리고 이 문제를 살펴보니 이미 변호사회에서는 난리가 났더군요. 기개 넘치는 선배 변호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용태영 변호사님이라는 분이십니다. 이분은 법조계에 일화를 많이 남기신 분인데 새 법원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지 않은 것에 저 이상으로 분개했던 모양입니다. 비록 각하를 면치 못했지만 법원을 상대로 법정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지 않은 것은 위법이라고 주장하며 (승강기 설치)공사 가처분 신청까지 했으니까요. 더욱 재미있는 것은 용변호사님이 중심이 되어 이 공사에 책임 있는 당시 대법원 건설국장(이 모 부장판사)에 대해 향후 변호사 등록을 받아주지 말자는 변호사회 특별결의까지 추진되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서초동 법원의 엘리베이터 설치는 요원한 일이었습니다. 용변호사님의 기개 어린 행동은 그저 어느 기인의 역사가 되었을 뿐 변한 게 없었지요. 그 일이 있고 나서 십수 년이 그냥 흘렀고 사람들은 그저 땀을 뻘뻘 흘리며 법정을 올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이 법원 청사가 준공된 지 15년이 될 무렵인 2004년 어느 날 법정동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엘리베이터 설치 배경은 이렇습니다. 2001년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에 박재승 변호사님이 당선됩니다. 저는 이 당시 서울변호사회의 섭외이사(현 국제이사)를 맡게 되지요. 서울변호사회는 1년에 두 차례 법원과 정례 간담회를 열었습니다. 간담회에서는 여러 법조 현안을 가지고 논의를 하는데, 첫 번째 간담회에서 저는 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도대체 21세기 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이런 수치스러운 법정 구조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민원인들의 수고를 덜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문제 제기에 당시 간담회에 참석한 서울고등법원 강 모 수석부장님(당시 법원 청사 관리는 고등법원의 소관 사항이었음)은 아직껏 생각해 보지 못했지만 들어보니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면서 한번 대책을 세워 보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이분이 공사가 완공된 상태에서 엘리베이터를 새롭게 설치하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겠다는 자못 비관적인 말씀을 하더군요. 그때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장님 제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법정 바깥으로 튀어나온 원통 구조물이 있는데 이곳이 비어 있다고 합니다. 이곳을 이용하면 설치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수개월이 흐른 뒤 두 번째 간담회로 기억합니다만, 강모 부장님이 참석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좋은 소식을 알립니다. 드디어 법정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기로 했습니다. 그간 서울대에 용역을 주어 엘리베이터 설치 가능성 여부와 설치할 경우 어디에 설치할 수 있을지를 알아보았는데, 답이 왔습니다. 법정 바깥으로 튀어나온 원통 구조물을 이용하면 설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서초동 법원 청사의 법정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것입니다. 이런 배경은 이제 법원도 잘 모를 겁니다. 매일 같이 법정을 오가는 변호사님들도 모를 겁니다. 아마 조금 눈썰미가 있는 분이라면 서초동 법원 청사의 법정동 엘리베이터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겠지요. 보통 엘리베이터는 건물 안에 만들어지는데 왜 이 건물은 밖에 만들어졌을까? 그것 참 이상하군... 이 정도의 의문을 품을 겁니다.
이것이 서초동 법원 청사 법정동 엘리베이터 설치의 비사입니다. 제 자랑이 되었지만 어쩌겠습니까 그것이 역사이니 ㅎㅎ. 오늘 그것을 생각하면서 사진 몇 장을 찍었습니다. 법정 전용승강기라는 표시를 보니 20년 전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2024.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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