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장/사법

형사공공변호인 제도는 왜 필요한가

박찬운 교수 2019. 4. 15. 16:38

 

제가 형사공공변호인 제도가 필요하다는 글을 쓰니, 몇 몇 후배 변호사들이 (심하게 까진 못하지만)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고 비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에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군요.

1. 우선 형사공공변호인은 우리 사법절차에서 시급한 제도가 아니다, 왜 중죄인에게 국가예산을 써서 변호인 조력을 제공하느냐, 이런 말씀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형사공공변호인을 찬성하는 것은 우리의 형사사법절차가 갖는 본질적 한계 때문입니다. 우리는(일본도 유사함) 수사절차에서 범죄혐의가 있다고 판단되어 검사가 재판에 회부하면 유죄를 받을 가능성이 99%입니다. 이것이 일본 전문가들이 말하는 정밀사법(精密司法)의 실상입니다. 이것은 억울한 사람이 재판과정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로지 1-2%의 행운아들만이 바늘구멍 같은 무죄의 구멍을 통과할 수 있는 것이지요. 

2. 반면 미국의 경우는 우리와는 상황이 상당히 다릅니다. 우리와는 수사구조와 수사방법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유무죄의 승부는 수사절차가 아니라 재판과정에서 갈라집니다. 그 한 가운데엔 배심제도가 있습니다. 미국에선 수사절차보단 공판과정에서 잘만하면 억울함이 풀릴 수 있습니다. 배심재판에 회부된 약 30%의 사람들이 무죄가 된다고 합니다. 이러니 변호사들의 주 무대가 공판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공판과정에서 전력을 투구합니다. 

3. 이렇게 볼 때 대한민국의 억울한 범죄혐의자들은 공판절차 보다도 오히려 수사절차에서 잘 막아야 합니다. 거기가 뚫리면 그것으로 사실상 그의 운명은 끝나는 것이니까요. 제가 오래 전부터 우리의 형사변호의 관심을 수사로 돌리자고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공판을 부실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수사과정에서 피의자들이 변호를 제대로 받아야 억울한 일이 안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오랫동안 싸워 만든 제도가 수사절차에서의 변호인참여(변호인입회)제도입니다. 변호인이 옆에 앉으면 그것만으로도 조사방법이 달라집니다. 인권침해는 줄어들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할 수 있게 됩니다.

4. 바로 형사공공변호인 제도는 이 변호인참여와 관계 깊습니다. 돈 있는 사람, 재벌 회장만 변호사와 함께 경찰서나 검찰청을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돈이 있든 없든, 어떤 이유에서든, 변호인이 없는 피의자가 속수무책으로 조사를 받게 해서는 안 됩니다. 변호사가 없는 경우엔 경찰서 인근에 대기하고 있는 변호사가 달려가 피의자 옆에 앉아야 합니다. 이것이 선진 외국의 수사절차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것을 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에게 돈이 없는 게 아닙니다. 변호사 수가 옛날처럼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못할 게 없습니다.

5. 많은 변호사들이 걱정하는 것이 돈입니다. 그들은 만일 형사공공변호인이 만들어지면 변호사들에게 열정 페이를 강요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리 되지 않길 바랍니다. 싼 게 비지떡이란 말은 현실적으로 매우 타당한 말입니다. 장시간 경찰서나 검찰청의 조사실에서 피의자의 조사에 도움을 주는 변호사들에게 그저 봉사만 외친다면, 이런 제도는 유명무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공적 부조에 참여하는 변호인들에게 사선만큼의 돈을 지급할 수는 없습니다. 그 액수는 우리 경제사정에 맞게끔 적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일지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하지 말고 정부와 변호사단체(변협)가 협의해야 합니다. 

6. 나아가 많은 분들이 형사공공변호인 제도를 시행한다면 현재 시행되고 있는 공판단계의 국선변호제도도 함께 손을 봐야 한다고 합니다. 이 주장은 정말로 타당한 말입니다. 피의자 국선제도(형사공공변호인)와 피고인 국선제도를 각각 별도로 운영하면 낭비적 요소가 많고 비효율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둘을 일원화해 한 기관에서 운영해야 합니다. 또한 많은 변호사들이 염려하는 것처럼 운영주체는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공적 기구가 맡는 것이 필요합니다. 국가가 직접 운영하거나 준국가기관인 법률구조공단이 맡는 것은 변호의 독립성에 비추어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7. 제 결론은 간단합니다. 형사공공변호인 제도는 이론의 여지없이 우리 형사사법 절차가 나아가야 할 방향입니다. 다만 그 운영을 어떻게 할 것인지, 정부는 이 제도에 어느 정도의 돈을 투자할지에 대해 보다 심도 있는 논의를 해야 합니다. 이 논의에서 이 제도의 주인공인 변호사들과 변호사 단체가 소외되면 안 됩니다. 그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 간절한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