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삶의 이야기

스승에 대한 기억

박찬운 교수 2023. 4. 2. 19:44
대학 4학년(1984년) 때 사법시험을 합격하고 고향 충청남도 청양을 방문했다. 유년 시절을 보낸 시골집은 이미 없어지고 집터만 있었다.

 
나는 어젯밤 글에서 요즘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질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과거 내 학창 시절 선생님들은 내게는 넘사벽이었다고 말했다. 그분들은 나와는 완전 딴 세상에 사는 분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분들이 나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오늘은 찬찬히 한 분 한 분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을 소환해 내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잠시 생각해 본다. 그분들은 내게 어떤 존재이었을까? (아래 나이는 내가 교수님들을 처음 만났을 때 연세이다.)

A 교수님(헌법). 50대 초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돈 걱정 없이 살아오셨다고 들었음. 교수님 중 가장 재산이 많은 분으로 자타가 공인. 독일 유학파인데 강의 시간에 무슨 말씀을 하신 것은 기억나지 않지만 항상 칠판에 독일어를 가득 쓰신 것은 확실히 기억함. 제자들에게 학문적으론 크게 남기지 못하셨지만 좋은 인성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심

B 교수님(00법). 40대 중반. 이재에 밝은 교수님. 강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음. 다만 강의 방식은 선명히 기억하는데, 말씀하시는 것이 마치 녹음기를 튼 것 같았음. 고시 공부를 하는 학생들에겐 음양으로 영향을 끼치심

C 교수님(민법). 40대 후반. 별로 아는 것 없는 시기였지만 교수님 강의를 신뢰하지 않음.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강의가 있었는데, 종강하는 날 우리들에게 처세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함. 당신 친구 한 사람(경찰관)을 소개하면서 그 친구는 면종복배를 좌우명으로 해 경찰 고위 간부가 되었다고 함.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강의실을 뛰쳐나오고 싶었지만 참았음. 적어도 20년 이상 그 선생님을 생각하면 그 말씀이 생각났음. 내 나이 50이 넘어서야 그 선생님 말씀이 이해가 되었음. 당시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으므로 당신의 제자들이 꽃도 피우지 못하고 죽어가는 일이 없도록 걱정하는 마음에서 하신 말씀으로 이해하였음.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 학교 고시 합격생 수를 급증시키는 데에는 이 교수님의 공헌이 큼

D 교수님(민법). 50대 초반. 당시 고시반 특강 시간에 모신 K 대학교 교수님. 민법학에선 자기가 최고라는 것을 자화자찬의 방법으로 보여 주었음. 강의 중에 당대 최고의 민법 학자인 서울대 곽윤직 교수님을 많이 비판하였음. 다만 한 가지 중요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이 내 귀에 아직도 쟁쟁함, “종을 치면 종소리가 납니다. 법률가의 머리를 치면 무슨 소리가 날까요?” 정답은 “한 번 치면 권리, 두 번 치면 의무” 나는 요즘 신입생을 만나면 민법 공부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가끔 교수님의 이 말씀을 해주고 있음

E 교수님(형법/형소법). 40대 후반. 학창 시절 이래 내게 가장 많은 것을 남기신 분. 풍채가 좋고 언변이 탁월하심. 당시 독일 유학파가 국내 형사 법학계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교수님은 강의와 논문에서 미국법 이야기를 많이 하심. 형법에선 법과 도덕의 구별을 강조하고, 국가 형벌권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함. 형소법에선 헌법적 형사소송에 입각해 법의 적정절차(Due Process of Law)를 유난히 강조함. 모든 수강생들이 다른 것은 몰라도 선생님이 내신 논술 문제에는 무조건 법의 적정절차를 써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음. 지금도 형법과 형소법에 관한 내 지식을 분석하면 그분에게서 나온 게 많아 나 자신도 놀랄 지경. 교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내가 제자를 대표해 추도사를 했음

F 교수님(상법). 40대 후반. 교수님 강의는 크게 생각나지 않음. 애연가라 강의실에서도 가끔 흡연하셨고, 학생들을 많이 웃기심. 수업 중에 당신이 재산이 많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자랑하시는데, 물론 학생들도 교수님이 웃기려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 요즘 같으면 큰 일 날 것 같은 말씀을 거침없이 하셨지만 당시 학생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게 생활화되었음

G 교수님(민소법). 40대 후반. 강사로 오신 현직 판사. 우리나라 민소법의 새로운 경지를 여신 분. 당시 당신이 쓰신 민소법 책이 수험생들에게는 필독서라 우리는 저자 직강 수업을 들은 것임. 특히 교수님은 당시 소송물 이론 중 판례와 달리 신소송물 이론을 취해 학생들로부터 매우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음. 실무가답게 강의 시간 중에 판례를 이야기할 때는 무불통지. 한마디로 걸어 다니는 판례이었음. 많은 학생들에게 민소법에 흥미를 갖게 함

H 교수님(헌법). 40대 초반. 이 교수님은 당시 K 대 교수님으로 우리 학교 고시반 특강에 초청됨. 이분을 통해 많은 학생들이 헌법학에 관심을 갖게 됨. 그때만 해도 헌재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이 헌법 강의가 판례 중심이 아니었음, 그 대신 헌법학의 주요 관심사는 독일 헌법 이론이었는데, 이분을 통해 독일 헌법학에서 말하는 헌법관(헌법을 보는 입장)이 소개됨. 한스 켈젠의 법실증주의 헌법관, 칼 슈미트의 결단주의적 헌법관, 루돌프 스멘트의 동화적 통합이론적 헌법관에 대해 배웠고, 이를 통해 우리 헌법의 주요 제도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었음. 이분 강의의 정확도는 놀라울 정도로 말씀을 받아 적으면 바로 문장이 될 정도. 세월이 흐른 다음 이분이 일간지에 쓰신 칼럼을 보고 많이 실망했음. 이런 글을 쓰시는 분이 어떻게 그런 놀라운 강의를 하셨을까?

I 교수님(형법). 40대 초반? 이 교수님도 당시 K 대학교 형법/법철학 교수님으로 우리 학교 고시반 특강에 초청되어 강의를 듣게 됨. 198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형법학은 학설 중심의 법학이었음. 범죄 각론보다는 범죄 총론이 학생들에게 훨씬 인기가 있었고, 저명한 형법 교수님들은 대체로 법철학자이기도 하였음. 이 교수님도 바로 그런 분이었는데 교수님은 당시 우리나라에 형법학에서 독일 형법 학자 록신의 사회적 행위론을 전파하였음. 형법학의 대상인 인간 행위는 사회적 의미가 있는 것에 한해 형법이 개입한다는 것임. 당시 우리나라에는 황산덕 -김종원 교수님으로 이어지는 목적적 행위론이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는데,  새로운 행위론이 들어옴으로써 형법에 대한 흥미가 더 생기게 됨. 나도 한 때 학자가 된다면 법철학에 기초한 형법 학자를 꿈꿨던 시절이 있었는데 아마도 이 교수님의 영향이 컸던 것 같음
 
이 정도가 내가 대학 시절 만난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이다. 위에서 썼지만 어느 교수님은 학문적으로 영향을 주셨고, 또 어떤 교수님은 학문보다는 인간성이나 인성 형성에 도움을 주셨다. 젊은 시절엔 스승을 욕하는 때가 많았다. 실력이 없다는 둥, 인격적으로 배울 게 없다는 둥.... 이런 건방진 평가를 하다 보니 오랜 세월 스승님들을 찾아 뵙지 못하다가 어느 날 부고장을 받고서야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제 나이를 먹어 교수로서의 삶도 종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내 강의를 듣는 젊은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가끔 궁금하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교수로 각인될까. 실력이 좋은 교수로 기억될까? 아니면 특별한 성품으로 감동을 주는 교수로 기억될까? 그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담담한 마음으로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저 내 자식이라 생각하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아낌없이 주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일이라 생각한다. (2023. 4.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