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르티아 센은 어떻게 진보의 아이콘이 되었는가
-회고록 ‘세상이라는 나의 고향‘을 읽고-

케임브리지와 하버드 대학의 경제학, 철학 교수.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장, 노벨경제학상 수상, 미국경제학회장, 인도경제학회장, 국제경제학회장, ’자유로서의 발전‘(1999), ’정의의 아이디어‘(2010) 등 베스트셀러의 저자...
이렇게 몇 가지만 열거해도 그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업적을 이루어냈는지 가늠조차하기 힘들다. 1933년 인도 뱅골에서 태어난 아마르티아 센은 한마디로 흥미진진한 인물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자유의 의미를 공부하는 과정에서였다. 나는 자유가 실질적으로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권리 주체의 역량이 담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는 자유는 그저 종이 위의 권리에 불과하다. 이런 자유를 적극적 자유라고 하는데, 이 개념을 이해하는데, 센으로부터 큰 영감을 받았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주류 경제학이 관심을 갖지 않은 문제에 천착했다. 그의 경제학을 후생경제학이라고 하는데, 그는 경제의 목표를 단순히 GDP의 성장에 두지 않고 인간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두었다. 이를 위해 인권과 민주주의가 중요하다는 것을 그는 여러 경제 이론을 통해 증명했다.
그가 발전시킨 사회선택이론(social choice theory)은 그 분야 전문가가 아닌 내가 쉽게 설명할 수 없지만, 인권과 경제발전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면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쩜 루소의 일반의지를 찾는 과정이고 롤스의 정의의 원칙을 연결시킬 수 있는 이론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실 나의 향후 과제 중의 하나가 인권법 연구에서 이러한 이론을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이므로 센은 앞으로도 나의 글을 통해 곧잘 거론될 인물이다.
아마르티아 센의 회고록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구입해 읽기에 들어갔다. 원제 Home in the World가 ’세상이라는 나의 고향‘으로 옮겨졌는데(김승진 옮김) 600쪽이 넘는 볼륨 있는 책이다. 회고록이지만 그의 90 평생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 3분의 1인 30세 전후까지의 이야기다. 그의 삶 전체에 흥미를 갖는 사람이라면 조금 의아하고 아쉬워할 일이지만, 이 책을 조금만 읽어보면 센이 왜 그런 회고록을 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태어나서 교육을 받아 학자로 성장하는 30여 년의 시간이 그에겐 무엇보다 값진 기간이었다. 이 시기 그가 무엇을 배웠는지, 무엇을 생각했는지, 어떤 사람을 만났는지, 이런 것을 이야기하다 보면, 우리는 센이라는 사람과 그가 전 생애 집중하게 될 연구과제의 단초를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조만간 다른 형태의 회고집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요즘 부쩍 눈이 침침해진 터라 이 책을 완독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더군다나 어떤 장면에선, 그의 생각을 잡아내기 위해 책장을 덮고 상당 시간 명상을 하기도 했으니, 독서의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읽었다. 읽는 내내 내 머리를 지배한 것은 아마르티아 센이 진보의 아이콘이 된 배경이었다.
우선 그 배경을 말하기 전에 센이라는 사람의 지성의 위대함부터 말해야겠다. 그의 위대함은 단지 그가 좋은 학교를 나와 좋은 커리어를 쌓고 좋은 저서를 냈다는 것에 있지 않다. 그것보다는 이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 그를 둘러싼 다양한 정체성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그것을 긍정의 힘으로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인도의 남자로서 태생적으로 힌두이고 뱅골인이다. 그는 경제학자와 철학자로 살았다. 그는 인도 캘커타의 프레지던시 대학과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했고, 케임브리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미국의 MIT, 스탠포드 등 다수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쳤고, 하버드대에서는 다년간 교수 생활을 했다. 그는 자신의 조국에서도 교수(델리 대학 등) 생활을 했고, 800년 만에 부활한 세계 최초의 대학 날란다 대학의 초대 총장으로 일했다. 그의 집은 영국과 인도에 있으며, 매년 겨울에는 뱅골의 옛집에서 보낸다. 그의 첫 번째 부인(이혼)은 인도인, 두 번째 부인(사별)은 이탈리아인, 세 번째 부인은 미국인이다. 이렇게 그는 다양한 정체성의 소유자로서 세계 곳곳을 누비며 살면서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켰고 그것을 세상의 약자들에게 돌려주었다. 나아가 세상사람들에게 다양한 정체성을 존중할 것을 호소했고 그 속에서 평화가 나온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제 센이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었던 배경을 하나씩 보자.
첫 번째 배경은 가족이다. 그는 놀라울 정도의 훌륭한 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영국 유학파의 다카 대학 화학 교수였고 할아버지는 다카의 판사였다. 어머니 쪽은 더욱 빛나는 혈통이다. 외할아버지는 산스크리트어와 고대 인도 고전을 연구하는 권위 있는 학자였고 20세기 인도의 탁월한 사상가인 시인 타고르의 친구이기도 했다. 외할아버지는 타고르가 세운 산티니케탄 학교의 책임자로도 일했다. 어머니는 신여성으로 산티니케탄 학교에서 타고르 밑에서 공부했고 20세기 인도 여성들 사이에서 보기 힘든 무용을 했다. 센의 이름 ’아마르티아‘(불멸이라는 뜻)는 타고르가 지어주었으며 센은 유년 시절 타고르의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이렇듯 센은 부자는 아니었지만 비교적 넉넉한 가운데 지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집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센의 외삼촌을 비롯해 집안 사람들은 대부분 좋은 교육을 받았고, 진보적인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어린 시절 센의 사고 형성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두 번째 배경은 가족적 배경에서 비롯한 교육이다. 센은 영국 식민지인 인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누구보다 좋은 교육을 받는다. 가정에선 교수인 아버지와 신여성인 어머니로부터, 특히 외할아버지는 일찍이 센에게 산스크리트어를 가르쳤고 센과 토론하길 즐겼다. 센이 대학을 가기 전에 다닌 산티니케탄 학교는 타고르의 사상이 지배하는 진보적 학교로 인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학교였다. 센은 이 학교에서 좋은 선생님과 친구를 만나 수많은 토론으로 정신적 훈련을 받았다. 그후 캘커타의 프레지던시 대학으로 진학해 인도 최고 교육기관이 제공하는 지적 자양분을 흡수한다. 거기에다 케임브리지 대학으로의 유학은 세계의 석학들과 장차 세계를 리드해 나갈 젊은 영재들을 만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이런 교육 환경 속에서 센은 지속적으로 진보성을 잃지 않고 자신이 지향해 나갈 학문을 스스로 발견하고 정진한다.
세 번째 배경은 성장기 교육환경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인맥이다. 센은 자신이 받은 교육환경에서 그저 도서관 공부에 만족하지 않고 기라성 같은 인재를 만나 토론하길 즐겼다. 그것은 케임브리지 이후 더욱 특별했는데, 인맥은 인도를 넘어 세계화되었다. 캘커타에서 책을 통해 만나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지적 영웅들 상당수를 영국과 미국에서 만나, 그들을 동료로 만들었다. 이 회고록을 통해 소개되는 사람들의 수만 대충 400여 명이나 되니 센의 인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에는 정의론의 저자 존 롤스, 현대 경제학의 대가 폴 섀무얼슨, 정치사상가 이사야 벌린 등이 있다.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이탈리아의 좌파 사상가 그람시 같은 이는 그의 스승 피엘로 스라파(그람시의 친구)를 통해 심층적으로 만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케임브리지의 각종 토론 모임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50년대 학창 생활을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에서 보낸 지적 명사들 상당수를 친구로 만든다. 그중에서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학자 몇 사람만 열거하면, 역사 학자 에릭 홉스봄, 역시 역사 학자인 퀜틴 스키너(스키너는 케임브리지의 비밀 조직이라고 하는 토론 모임 사도회에서 만난 멤버임), 국제법 학자 이언 브라운리 등이 있다. 그의 인맥은 경제학을 토대로 하지만 그것을 훨씬 뛰어 넘는다. 예를 들면 그는 아웅산 수키 여사와도 잘 아는데, 그것은 아시아 연구가인 그의 남편 마이클 아리스를 통해서다. 재미 있는 것은 이번 미국 대선의 민주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도 남다른 인연이 있다는 사실. 센은 그의 부모를 잘 안다. 센은 1964년 버클리 대학의 방문교수 시절 그녀의 부모(아버진는 자마이카 출신의 경제학자, 어머니는 인도 출신의 의사) 집을 자주 방문했는데, 카멀라는 그 해 출생했다고 한다.
네 번째, 위의 가족 및 교육환경을 통해 학자로서 필요한 단단한 토대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그는 평생 추상적 논증과 현실적 문제에 대한 분석을 통해 자신의 진가를 인정받는다. 이 부분은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내가 생애에 걸쳐 할 수 있었던 얼마 안 되는 일들(그것보다 더 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한다)을 돌아보니, 크게 둘로 나눌 수 있고 둘 다 학창 시절에 토대가 꽤 단단하게 확립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는 추상적인 논증(사회 정의의 개념에 대한 탐구나 사회적 선택의 여러 경로를 공리, 정리, 증명을 통해 탐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의 실질적인 문제들(기아, 굶주림, 경제적 박탈, 그리고 계급, 성별, 카스트에 의해 따른 불평등)을 분석하는 것이다.”(166)
이것은 그가 어린 시절 인도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로 분리되는 과정에서 본 종교 간 갈등, 1943년의 뱅골 대기근이란 삶의 현장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경제학과 철학의 기본 주제로 만든 것과 관련이 있다. 삶에서 분리된 고고한 학자는 그가 지향한 학자의 길이 아니었다. 그는 삶의 현장을 중시했고 문제를 해결하는 학자로 자리매김하길 원했다. 이것은 마치 삶의 고통에서 영원한 진리를 발견한 부처의 길이었고, 수학과 철학에서 출발해 인류의 고통에 참을 수 없는 연민을 느낀 버트런드 러셀의 삶과도 유사한 것이었다.
센은 뱅골인으로 태어나 세계인이 되었다. 세계인으로 살면서도 그는 뱅골인의 뿌리를 잊지 않고 산다. 갈등 속에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평화 속에서도 갈등으로 위험 속에 사는 사람들을 잊지 않는다. 이 회고록을 읽으면서 후생경제학, 사회선택이론은 그런 삶을 사는 센의 칼과 방패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고록을 읽는 내내 나의 왜소함을 느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아마 이 책을 진지하게 읽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의 여러 배경이 우리로서는 한마디로 넘사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와 비교할 때 따라가기 힘든 환경이지만 나란 사람(우리 모두)도 다양한 정체성을 안고 살아가고 있으니 센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할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은 세계적으로, 삶은 현실적으로‘(Think globally, act locally) 이런 모토로 살아가는 게 내 길 아니 우리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센은 살아계시다면 올해 92세가 되는 내 어머니와 동갑이다. 그는 아직 정정하니 다음 회고록을 불원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만수무강을 빈다. (2024.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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