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야기 14
위엄과 권위의 전당
Royal Court of Justice
왕립재판소 입구
나는 변호사 시절 매일 같이 법정을 오갔다. 거기서 각종 송사를 경험하면서 법률가로서의 길을 걸었다. 그 시절 나는 우리 법정에 불만이 많았다. 그 중 하나는 법정이 도대체 위엄도 권위도 없다는 것이었다. 법정을 가면 도떼기 시장을 방불할 때가 많았다. 변호사들은 먼저 재판을 받으려고 새치기를 하는가 하면 방청객들은 재판 도중에도 들락날락 하면서 엄숙한 분위기를 깨기 일쑤였다.
법정이란 공간은 한 인간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엄청난 공간이다. 때문에 이런 권한을 행사하는 법정의 위엄과 권위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만일 법정이 그것을 잃는다면 한 사회의 질서는 사망을 고할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우리 법원(법정)의 위엄과 권위는 문제적이다. 법원청사는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권위주의적이다. 민과 관이 엄격하게 분리되고 모든 게 관 중심으로 만들어져 있다. 법원 내로 들어가면, 출입구엔 보안검색대도 있고, 법정에 들어가면 질서를 담당하는 법정 경위도 있다. 거기에다 판사는 재판 도중 수시로 법정 질서를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법정의 위엄과 권위를 세우기엔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우리나라 법원(법정)은 권위나 위엄이 있기 보다는 '권위주의'적이다. 서초동 법원종합청사를 보라. 언덕배기 위에 건립한 저 우람한 건물은 주변 건물을 압도한다. 다른 건물들은 고도제한으로 높이 지을 수도 없다. 원래 저 법원은 민원인이 법정으로 올라갈 때 승강기도 없었다. 판사들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전용승강기를 이용해 법정으로 내려 옴에도 소송당사자를 비롯 변호사까지 땀을 뻘뻘 흘려가며 법정을 올라가야 했다. 승강기가 설치된 것은 저 법원이 건립된 지 20여 년이 지난 뒤였다.
그러면 영미법의 종주국 영국의 경우는 어떠할까, 한국을 떠나기 전부터 그게 알고 싶었다. 위엄과 권위가 넘친다는 영국의 법정, 도대체 그것은 어떤 곳일까? 오늘 나는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런던 시내 스트란드 거리(Strand Street)에는 Royal Court of Justice라는 우람한 건물이 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왕립재판소. 그 기능은 서울 서초동 법원종합청사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빅토리아 여왕 시절 런던에 산재해 있는 법원(1심 법원인 High Court 및 항소법원인 Court of Appeal of England and Wales)을 통합해 만든 법원청사다. 개청 연도는 1882년. 바로 여기가 영국 법원을 대표하는 곳으로 내가 오늘 가보야 할 곳이다.
내 눈에 들어온 왕립재판소, 일견 관공서 같지 않다. 대성당을 보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빅토리안 고딕양식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우리처럼 대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현관까지는 대로에서 불과 10미터!) 성당 중앙 내이브(통로)에 들어선 듯 대형 홀이 눈앞에 펼쳐진다. 사진을 못 찍게 하니 그것을 담을 수 없는 게 아쉽다(이 중앙홀만은 독자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어서 구글 검색을 통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 아래 사진을 보기 바란다).
문 앞에선 엄격한 보안검색이 이루어진다. 나는 가방과 자켓을 검색대 위에 올려놓았다. 법원은 시민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으나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검색은 문 앞에서부터 철저하다.
왕립재판소의 중앙홀, 마치 성당에 들어온 듯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사진 Daniel Borg, flickr.com.
중앙홀을 둘러보니 홀 벽엔 영국 사법사의 위인들의 대형초상화가 붙어 있다. 그 중 한 사람은 초상화는 물론 대형 조각상까지 설치되어 있다. 누군가하고 살펴보니, 블랙스톤(1723-1780). 그는 영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법률가다. 재판관을 거쳐 옥스포드에서 교수생활을 하면서 영국법을 학문화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했다.
그가 쓴 <영국법 코멘타리(Commentaries on the Laws of England)>('영법석의'라고 번역되기도 함)는 지금까지 영미 법률가들 사이에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영국법의 경전이다. 조각상은 1926년 미국법조협회(America Bar Association)가 미국법에서의 블랙스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선물한 것이다. 그것을 알리는 당시 신문기사도 벽면에 붙어 있다.
중앙홀 벽면의 블랙스톤 초상화와 그의 조각상, 어렵게 이 사진을 찍었다.
이 재판소는 1882년 개청 이래 최근까지 법정 수의 증가로 인해 건물을 계속 확장해 왔다. 그런 이유로 법정 수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표지판만 보아도 법정 번호가 100단위를 넘는다. 나는 가장 오래된 본관 건물 내의 법정 하나를 찾았다. 오후 1시에 열리는 형사법정이다.
법정에 들어가는 순간 숨이 막혔다. 법정은 130년 전에 만들어진 그대로! 높은 천정엔 샹들리에 두 개가 나란히 걸려 있다. 법정을 둘러보니 판사들이 앉는 법대 좌석 뒤로 문이 하나 있고 그 좌우론 책이 꽂혀 있는 서가가 있다. 서가는 그 외에도 법정 좌우, 후면에도 설치되어 있다. 무슨 책이 꽂혀 있는가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Weekly Report of Courts라는 책이 대부분이다. 아마도 법원에서 나오는 판결집이라고 생각된다.
법대 오른편 벽엔 이 층 높이에 철창으로 이루어진 박스가 하나 있다. 그게 무엇일까? 알고 보니 구속 피고인이 입정하는 경우 법대 앞에 서지 않고 변호사와 함께 이 철창 속에 있게 된다. 아무리 위험한 피고인이라도 법정에서 사고칠 가능성은 없을 것 같다.
법대 앞엔 3인이 방청객을 향해 앉아 있다. 두 사람은 평복을 입고, 한 사람은 법복에 가발을 썼다. 아마도 두 사람 중 하나는 속기사 또 다른 이는 기능직 직원으로 보인다. 가발을 쓴 이는 로클럭 곧 법원서기다. 변호사 몇 명이 들어와 앞 줄에 앉아 있는데 모두 법복에 가발을 쓰고 있다. 첫 열은 당사자 석, 그 다음 열은 변호사 석인듯 하다.
가발을 쓴 변호사 두 명이 자리에 앉아 있고, 그들 손엔 모두 노트북이 들려 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재판 막간을 이용해 쉬지 않고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여기 변호사(바리스터)도 역시 바쁜 것은 어쩔 수 없는 듯. 자투리 시간도 여지 없이 일을 해야 하니.
왕립재판소 앞에서 기념촬영
법정 내에는 두 대의 대형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다. 하나는 당사자 및 방청객용, 또 다른 하나는 법관용.
여론이지만, 독자들에게 영국 법정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재판 장면을 찍은 사진은 내가 찍을 수도 없지만 어디에서도 구할 수가 없다. 영국에선 전통적으로 재판이 진행되는 법정 사진 촬영은 절대엄금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법정 사진 촬영은 매우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허용한다고 한다.
1시 정각이 되니 법관이 입정한다. 3명의 법관은 모두 까만 법복에 하얀 가발을 쓰고 나온다. 법정 경위가 법관 전용 출입문을 열어주면서 방청객들에게 기립을 명한다. 법관의 비서라 생각되는 사람이 들어와 의자를 뒤로 빼 재판장이 앉을 때 도움을 준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법관에 대한 예우다.
개정이 되니 법정은 쥐죽은 듯이 조용하다. 첫 사건은 불법무기 소지 등의 혐의로 기소된 사건의 선고기일. 피고인과 변호사는 법정에 출석을 하지 않고 별실에 있는 모양인데, 그들 모습이 법정의 폐쇄회로 화면에 나타나고 있다.
드디어 판결문이 낭독된다. 그런데 이 낭독을 재판장이 하는 게 아니라 좌배석 판사가 한다. 여기 재판관행을 잘 몰라 무엇이라 말하기 힘들지만 아마도 주심법관이 판결선고를 하는 것 같다. 재판장은 그저 재판 진행만을 담당하는 듯. 선고결과는 집행유예. 폐쇄회로로 연결된 모니터에서 변호사와 피고인이 '댕큐"라고 인사한다.
첫 사건이 끝나자 다음 사건을 위해 잠시 휴정에 들어간다. 법관들이 나갈 때 경위는 법관들 뒤로 가 문을 열어주고 방청객에겐 기립을 명하니 모든 법정관계자 및 방청객들이 일어나 예를 갖춘다.
내가 본 바로는 영국 법정은 위엄과 권위그 자체다. 수 백 년 전통을 간직한 고색창연한 법정에서 법률가들은 전통적인 법복과 가발로 단장한 다음 재판에 임한다. 물론 그 속에서도 20세기가 선물한 컴퓨터는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어떤 당사자들도 이 위엄과 권위가 철철 넘치는 법정 분위기를 무시하긴 어려울 것이다.
(2016.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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