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시절을 보내며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이 그렇겠지만 지난 몇 달은 우리 인생에서 잊지 못할 시간이었습니다. 우울함의 극치였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우울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나이를 먹어가면 더 그렇지요. 홀몬 변화 때문인지 시도 때도 없이 우울함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찾아온 우울함은 그런 우울함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저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겪는 집단 우울증입니다. 누구에게 호소하기조차 어려운 심리적 공황상태를 매일매일 경험합니다. 지금 돌아가는 것을 보니 이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더 지속될지 모르겠습니다. 이 마음을 누구에게 말하겠습니까. 잠시 허공에 대고 하소연이라도 하지 않으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여기에 몇 자 적습니다.
권위주의 정권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독재자의 서슬푸른 권력에 숨죽이며 살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그 어두운 장막이 걷히고 조금씩 세상은 자유를 찾았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대한민국은 자유로운 공화국이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전히 많은 갈등은 있지만 그래도 세상은 앞으로 나아간다는 믿음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12. 3. 밤 시계가 갑자기 40년 전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생방송으로 군대가 국회의사당에 난입해 유리창을 깨는 것을 보고 저런 비현실적 사태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망연자실했습니다.
저는 믿었습니다. 저런 행위는 사리분별 못하는 지도자 한 사람을 잘못 선택한 바람에 일어난 일과성 해프닝일 것이라고. 그러니 금방 이성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사태는 진정되고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또 다른 비현실적인 사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집권 여당이 그 명백한 위헌 사태를 옹호하고 나섰습니다. 길거리에는 그 명백한 내란행위를 국민 계몽령이라고 부르는 광신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찻잔의 태풍 정도로 여겼던 군중의 수가 시간이 가면서 수를 불리더니 급기야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웠습니다. 거기에다 내란 우두머리를 따르는 폭도가 법원을 습격하는 대한민국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법률가는 이 사태의 불법성에 대해 분명한 생각을 가질 줄 알았습니다. 제가 배운 법률지식으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태이니까요. 그런데 대한민국 석학이라는 어느 헌법학 교수님부터 주변의 알만한 변호사까지 상당수의 법률가가 내란 우두머리를 옹호합니다. 명색이 법률가라는 사람들이 중무장하고 국회로 난입하는 군인들을 보고도 그런 주장을 하니 저로선 도저히 이해 불가입니다. 더군다나 과거 저와 같이 일한 동료도 거기에 포함되었으니 제가 헛살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헌법재판소가 빠른시간 내에 내란의 우두머리를 권좌에서 내쫓을 줄 알았습니다. 중인환시리에 일어난 명백한 헌법유린 사태를 판단하는 데도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까. 그럼에도 예상을 벗어나 한 달이 두 달이 되고 두 달이 세 달이 되도록 소식이 없습니다. 모든 게 오리무중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우국지사도 애국자도 아닙니다. 그저 개인적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제멋에 살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부도 명예도 쫓을 욕망도 없는 사람입니다. 몇 년 후 정년이 되면 자유롭게 세상을 주유하며 글이나 쓰겠다는 작은 소망을 안고 살아가는 소시민 지식인입니다. 그런 제가 요즈음 날마다 나라 생각에 밤잠을 설칩니다. 피곤한 몸에 잠시 잠이 들었다가도 깨면 다시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머리에 온통 언제 헌재가 “피청구인 윤00을 파면한다”라는 선고를 할까 그 생각 뿐입니다.
저는 성격상 광장에 나가 소리를 지르지도 못합니다. 누구는 단식으로 항의를 표시하기도 하지만 그런 일은 차마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제 생각의 일단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좋게 말하면 키보드 워리어? 그런 정도입니다. 물론 그것도 꾸준히 하니 지난 3개월 동안 50개가 넘는 글을 썼더군요. 이 글도 그중 하나가 될 겁니다. 제가 한 일은 고작 그것뿐입니다.
가급적 조용히 살려고 노력합니다만 작금의 사태는 저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합니다. 우울하기 그지없는 봄입니다. 이 봄이 가기 전에 이 우울함에서, 이 분노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요? 저는 소망합니다. 반드시 그날이 오도록!
(2025.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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