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인생/기타

이쾌대 전을 관람하고

박찬운 교수 2015. 9. 26. 18:17

이쾌대 전을 관람하고


비가 그치니 더위가 보통이 아닙니다. 일요일 오전, 시간을 내서, 덕수궁 현대미술관을 다녀왔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라도 가고 싶었던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이쾌대 전.


이쾌대(1913-미상). 월북작가라는 이유로 오래 동안 우리가 알 수 없었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쾌대야말로 백남준과 더불어 20세기를 대표하는 한국의 화가입니다. 이 말은 제 말이 아니라 전시회 도록 첫 페이지에 나오는 말입니다.


가끔 이곳저곳에서 보이는 이쾌대의 작품을 한꺼번에 보고 싶었습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30-40년대 그가 그린 유화, 드로잉, 편지 및 유품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월북작가이면서도 이 정도의 작품과 유품이 남아 있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사랑하는 처 유갑봉과 자녀들의 공입니다. 유갑봉은 한국 전쟁 이후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남편이 그린 그림을 고스란히 보존했다고 합니다(오늘 전시회 마지막 공간에는 이쾌대의 문패가 있더군요. 아마도 유갑봉은 그가 떠난 후 현관에 걸렸던 문패마저 보관해 두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화가인 그의 아들로 이어졌고요.


1988년에서야 비로서 그의 그림은 해금되어 세상에 나옵니다. 그의 가족들의 아픔이 얼마나 컸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오늘 전시회를 돌아보면서 저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많은 그림이 그의 가족들에게서 나왔을 터인데, 가족을 위한 배려가 아쉽더군요.


이쾌대. 그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도록에 이런 설명이 있어 옮겨 봅니다.

“이쾌대는 르네상스 미술부터 20세기 초 사회주의 리얼리즘까지 다양한 미술을 폭넓게 수용하였고, 여기에 한국의 역사적 상황과 전통의 색채를 결합함으로써 한국적인 리얼리즘 미술을 창조하였다.”


이쾌대 전을 보면서 매우 놀란 것은 그의 부부애입니다. 그는 휘문고보 시절 자유연애로 유갑봉과 결혼한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동경미술학교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한국전쟁 때까지 화가생활을 하고 부인과 헤어졌으니 대략 17-8년간의 결혼생활을 했을 겁니다. 이 기간 동안 유갑봉은 그의 상상력의 원천이자 작품 대상이었습니다. 이번 전시회에 나온 여성 초상화는 대부분 유갑봉입니다. 몇 점의 누드화도 분명 그녀의 나신일 겁니다.


이들이 20대에 얼마나 애뜻한 사랑을 했는지는 이번 전시회에 나온 한 연서를 보면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이쾌대가 유갑봉에 보낸 편지입니다. 저는 이제껏 살면서 이런 연서를 보질 못했습니다. 놀랍게도 지금부터 100년 전에 태어난 한국 남자의 편지입니다.


“오! 어여쁜 아가씨여 
오! 나의 귀여운 천사여!
나는 지금 안타까움에 이기지 못하여서
오직 책상 앞에 우두커니 앉아서
무아몽중에 있습니다.
...
영원토록 나의 품에 고요히 안고 지내고 싶어요.
당신의 그 따스한 몸에 나의 살이 닿을 때마다 
이상하고 야릇한 정취가 무궁한
이 우주 사이에 오직 우리만을 싸고도는 것 같습니다.
...
오! 내 사랑 참된 나의 사랑!
한 떨기의 장미꽃! 나는 그대 뜰로
배회하는 벌나비올시다.
...“


이런 사람이 어떻게 해서 1953년 반공포로교환 때 북을 선택했을까요? 거제도 수용소에서 매일같이 처와 아이들을 보고 싶다고 했던 그가 어찌해서 북으로 갔을까요?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어떤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비극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합니다. 휴전선을 넘어가는 그의 발걸음이 어땠을까요, 뒤를 연신 돌아보았을 그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합니다.


오늘 전시회에 나온 그림 중 일부를 인터넷에 찾아 여기에 게시합니다.

이 글을 보는 페친 여러분, 한 번 시간을 내 덕수궁을 가보십시오. 거기서 20세기 최고의 화가 이쾌대를 만나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