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타클라마칸 실크로드

타클라마칸 실크로드 기행(1)

박찬운 교수 2015. 9. 26. 20:27

타클라마칸 실크로드 기행(1)

돌아올 수 없는 사막, 타클라마칸


곰곰이 생각하면 내겐 두 개의 유전자가 있다. 하나는 방랑의 유전자다. 나는 번잡한 세상일을 하는 상황에서도 머릿속에선 끊임없이 일상을 탈출하고자 하는 본능적 욕구가 있다. 떠나고 싶다, 이 현실에서 말이다. 또 다른 하나는 호기심의 유전자다. 나는 무엇이든 알고 싶다. 특히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다. 나와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들의 오늘이 있게 한 결정적 원인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알고 싶다.


나는 왜 사막으로 갔을까. 이 혹독한 여름, 평균 40도가 넘는 열사의 땅에 가서 나는 무엇을 구하려했을까. 그래, 나는 방랑하고 싶었다. 나는 사막을 종횡무진하며 내 방랑의 욕구를 채우고 싶었다. 그래, 나는 알고 싶었다. 1400여 년 현장이 갔다는 그 길을 따라가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천축국으로 갔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갔다. 그런 것들을 채우기 위해 사막의 태양 아래에 섰고, 모래 바람을 맞으며 거친 호흡을 하고 돌아왔다.


타클라마칸,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사막이다. 이 넓은 땅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중국의 신강위구르자치구에 속하는 이 사막은 오랜 세월 인간의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크기? 동서로 1,500킬로미터, 남북으로 500킬로미터. 그러니까 이 사막의 면적은 한반도의 3배 크기다. 하늘에서 보면 온통 황토색 대 평원이다. 모래 사구가 끝없이 펼쳐지는 사막 혹은 돌맹이, 바위만이 대지의 주인인 고비가 펼쳐진다. 어느 호텔방에 있는 책자에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신강에 오지 않으면 중국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없다.’ 타클라마칸에 달리다보면 이 말이 어떤 말인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타클라마칸은 동서문명 교통로인 실크로드 구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었다. 많은 여행객들이 이곳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죽어갔다. 한 때 그들의 뼈와 그들이 타고가 낙타 뼈는 타클라마칸 사막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번 이 사막에 들어가면 ‘돌아 올 수 없다’는 의미로 ‘타클라마칸’이라 했다.


실크로드가 기원 전후로 개척되어 동서문명 교통로로 절정의 상태에 있었던 것은 기원후 7-8세기인 수·당 시절이었다. 이 당시 타클라마칸은 서역의 일부였다. 현재의 감숙성 둔황까지가 중국 왕조의 영역으로 관리되었기 때문에 이곳 밖의 서쪽 땅은 모두 서역이라고 불렸다. 이 서역 땅 타클라마칸은 크게 두 루트의 길을 만들어 여행자를 더 서쪽 땅, 곧 파키스탄이나 인도 혹은 파미르 고원 서쪽의 중앙아시아로 안내했다.


하나는 서역북로라고 불린 것으로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에 난 오아시스 길이었다. 둔황을 출발하여 트루판, 쿠얼러, 쿠차, 아카수를 거쳐 카쉬가르로 이어진 길이다. 또 다른 하나는 서역남로라는 것으로 둔황을 출발하여 누란, 호탄(현재 명 허텐), 야르칸트(현재 명 사차)를 거쳐 역시 카쉬가르로 이어졌다. 이 두 길은 모두 천산산맥의 남쪽에 있다하여 편의상 천산남로라고도 불린다.


나의 이번 여정은 바로 이 천산남로를 밟아보는 것이었다. 비행기로 신강자치구의 성도인 우르무치에 도착하여 버스를 이용, 트루판, 쿠얼러, 쿠차를 밟았고(이상 서역북로), 쿠차에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사막공로를 이용 장장 700킬로미터를 질주해, 호탄에 도착한 다음, 거기서 사차를 경유(이상 서역남로), 남로와 북로가 만나는, 중국의 최서단 카쉬가르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은 이 과정에서 사막과 주변 자연을 감상함과 동시에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 온 불교 유적지를 살폈다. 특히 북로의 쿠차 인근에 있는 키질 석굴은 중국 4대 석굴 중 하나로 이름 높은 곳으로 이번 여행의 백미였다. 하지만 여정상의 유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8세기 이후 이곳엔 이슬람이 들어옴으로써 불교유적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더욱 20세기 초 서양탐험대에 의한 유물 약탈은 이곳 실크로드상의 불교유적을 사실상 공동화시켜 버렸다.


하여, 이번 여행은 타클라마칸 사막, 그 자체를 보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그 길을 타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었다. 이런 여행에선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 스토리가 없다면 단번에 식상할 수밖에 없는 여행이다. 사막이 아름답다고 해도 순간이다. 가도 가도 사막인 이곳에서 그 아름다움에 감격하는 게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어떤 유적지를 찾아도 알맹이는 없다. 그것들을 기대했다면 실망뿐이다. 그저 다 쓰러져가는 진흙더미에 불과하다. 그 찬란했던 동굴벽화도 거의 없다.


이 여행을 의미 있게 하기 위해선, 망망한 사막에선 대상들이 낙타에 바리바리 싣고 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신기루를 볼 줄 알아야 하며, 텅 빈 동굴에선 찬란했던 시절 형형색색의 벽화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초라하게 남겨진 흙더미 속에서도 번성했던 고대왕국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이번 여행을 함께한 분들은 나보다 연상이었고 다년간 세계여행을 한 분들이었다.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어떤 분은 아프리카를 6번을 다녀왔고, 또 어떤 이는 인도를 4번 다녀왔다. 심지어 천산남로 실크로드 기행만 3번을 한 분도 있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여행 중 이 여행의 의미를 부여하고, 황량한 사막과 텅 빈 유적지에서, 번영했던 실크로드를 맛깔스럽게 설명한 이는 따로 있었다. ㅎㅎㅎ.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지만, 내 역할은 끊임없이 설명하는 것이었고, 일행은 내 말을 듣기 위해 버스에 고정석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나의 이번 여행은 두 번째 실크로드 기행이다. 4년 전 나는 시안에서 우르무치까지 3천 킬로미터를 돌면서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천수 맥적산 천불동, 란주 병령사 석굴, 돈황 막고굴, 트루판 베제클리크 천불동 등등... 나는 그 여정을 2013년 펴낸 <문명과의 대화>에 담았다.


이번 여행으로 나의 실크로드 중국기행은 모두 끝났다. 다음 목표는 더 서쪽으로 가는 것. 아마도, 멀지 않은 장래에 파미르를 넘어 중앙아시아, 타쉬켄트, 사마르칸드, 탈라스 등이 내 다음 여정을 장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