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걸음이 무겁다. 나는 집을 떠나 강남의 H카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딱히 일이 있어서도 누굴 만나기 위해서도 가는 것이 아니다. 주말 점심을 먹고 나면 의례 가는 곳이 거기이기 때문이다. 몸속에 무슨 자동장치가 박혀 있는지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나를 그곳으로 이끈다. 나는 H카페 창가에서 두어 시간 거리를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이것이 내 삶의 중요 부분이다.
H카페에 들어서자 홀은 텅 비어 있다. 가끔 이런 때가 있다. 바리스터 O양이 나를 보자 반갑게 인사를 한다. 나는 말 없이 눈인사를 하고 창가에 앉는다. O양은 능숙한 솜씨로 내 전용 카페라테 한 잔을 만든 다음 종을 울린다.
“오늘 조금 날씨가 좋지 않네요. 교수님 안색이 좋지 않은데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무슨 아무 일도 없지. 비가 오니 그리 보이는 거지. 내가 늙었지만 조금 센티해. ㅎㅎ 아무튼 고맙네.”
창밖 거리에서 짙은 여름 냄새가 풍겨 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초록이었던 플라타나스 잎은 어느새 녹음으로 바뀌었다. 뿌리로부터 치솟아 올라간 수액 덕에 나뭇가지는 사방팔방으로 뻗어간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이리라. 나의 하얀 머리가 오늘따라 빛을 더욱 발한다. 잠시 눈을 감으니 몸이 흔들린다.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독백.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거칠 것이 없었던 시절, 자신만만한 시절이 있었지. 몸도 천하장사가 부럽지 않았지....”
눈을 감는다. 떠오르는 몇 사람이 있지만 어쩐지 가물가물하다.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떠올리고 그들과 함께 했던 이 거리의 추억을 소환한다. 벌써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는 말인가. 그 때의 내가 지금의 나란 말인가. 핸드폰을 꺼내 오래전 보관해 놓은 사진 몇 장을 꺼내 한 장 한 장 살핀다.
“지금 그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와 보냈던 그 순간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까”
시간이 되어 일어섰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입고 나온 청바지가 카페에 들어오는 햇빛에 반사되어 하얗게 빛바랜 듯 보인다. 카운터에서 O가 웃으며 작별인사를 한다.
“오늘 교수님 청바지 입으셨네요. 훨씬 젊어 보이시는데요.”
이제 비는 그쳤다. 우산을 지팡이 삼아 집으로 돌아가는 내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오늘 여기에 왜 왔더라? 아 카페라테 한잔 마시러 왔지. 서울 시내에서 여기보다 내 입맛을 잘 아는 곳은 없을거야.”
주말 오후를 이렇게 보냈다. 다음 주말은 어떨까? 아마 특별히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2023. 5. 30.)
'삶의 여정 > 고독과 슬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어떻게 늙어가고 있는가 (0) | 2024.02.20 |
---|---|
가을밤의 넋두리-고독한 삶은 운명인가- (0) | 2023.09.28 |
스스로에게 주는 위로 (0) | 2023.05.22 |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0) | 2023.05.21 |
목련꽃 (0) | 2023.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