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고독과 슬픔

스스로에게 주는 위로

박찬운 교수 2023. 5. 22. 04:52

 

내 삶의 대부분이 이루어지는 공간, 집 서재와 학교 연구실

 
3년 공직 생활의 후유증이 꽤 크다. 환갑 넘기고 진갑을 목전에 두니 나이의 무게감도 무시할 수 없다. 겉보기엔 학교 생활에 빨리 적응하는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못하다. 알게 모르게 무기력증, 우울, 고독이 수시로 찾아온다. 별일 아니려니 생각하고 일부러 잊으려 했으나 그럴 일이 아닌 것 같다. 상태가 어떤지 나 스스로를 관찰해 본다.

무엇보다 사람 만나기가 싫다. 이 증상은 공직으로 가기 전 이미 생겼다. 그것은 아마 교수라는 직업이 준 선물 아닌 선물이었다. 일을 함에 있어 특별히 사람을 만날 일이 없으니 그저 연구실에서 혼자 있는 것에 만족했다. 공직 생활 중에는 공무상 어쩔 수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런 중에도 사적 모임은 거의 안 했다. 사적인 모임은 대체로 저녁 시간대에 이루어지는 법인데, 코로나 시기와 맞물려 자연스럽게 저녁 모임을 피할 수 있었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면 점심때 만나 간단히 식사하고 차 한잔 같이하는 게 전부다. 애경사 소식이 와도 직접 가는 경우는 많지 않다. 부조금을 보내는 정도에서 사람 노릇 한다.

책을 읽는 것도 시큰둥하다. 독서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책을 멀리하고 있다. 책상에는 읽어야 할 책이 수십 권 쌓여 있지만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다. 어쩌다 마음을 먹고 손을 대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는 일은 드물다. 몇 년 전 출판한 ‘궁극의 독서’와 그 속에 나오는 책들을 서가에서 볼 때마다 만감이 교차한다. 저 책을 쓸 때만 해도 주말에 책상에 앉으면 10시간 이상 움직이지 않고 베개만한 책을 읽었고, 또 정리했다. 내가 언제 저런 책을 읽었는가, 내가 언제 저런 글을 써 책을 냈는가.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은 사람인가.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막상 첫 문장을 쓰고 나면 다음 문장으로 나아가질 못한다. 이유를 생각하니, 글쓰기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쓸 이야기거리가 없다. 몇 년 전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그때는 쓰고 또 써도 머릿속에 뭔가가 꽉 차 있었다. 글로 토해 내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갈망이 있었다. 지금 내겐 그런 갈망이 자취를 감췄다. 글을 쓴다고 해도 내가 만나야 할 미래에 대해 쓰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는 이야기뿐이다. 회고적 인간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독서가 시큰둥해지고, 글 쓸 소재가 빈곤해졌다는 것은 사실 호기심이 줄었다는 말이다. 나는 호기심 많은 사람이었다. 그것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2010년 이후 10여 년간 많은 글을 썼고, 그 글이 책으로 나왔다. 내 블로그엔 800개가 넘는 다양한 내용의 글이 있다. 이렇게 많은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호기심 덕이었다. 나는 알고 싶었고, 이해하고 싶었고, 느끼고 싶었다. 그런 내가 요즘 특별히 알고 싶고, 특별히 이해하고 싶고, 특별히 느끼고 싶은 게 없다. 이것이야말로 내 삶에 위기가 왔다는 신호다.

이런 무기력과 고독 그리고 우울 속에서도 공직 퇴임 이후 3개월간 많은 일을 했다. 강의 준비를 하고, 책을 쓰고, 논문을 썼다. 적어도 겉으론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나는 나를 안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분명히 다르다는 사실을. 이것이 나이 탓일까? 남성 호르몬 분비가 급격히 줄어든 이유일까? 분주한 3년을 보냈으니 당분간 휴식이 필요하다는 신호일까? 다 일리 있는 이야기이다. 나이가 주는 무게감도 이젠 무시할 수 없다. 요즘은 환갑이란 것이 그저 중년의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역시 그 숫자를 넘기니 몸이 달라진다, 마음의 상태도 달라진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인 듯하다.

바야흐로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다.
이 시기를 잘 이겨내면 앞으로 10년의 삶은 그런대로 밝을 것이다. 일의 정년기에 알맞은 역할을 찾아내 아름다운 마감을 하도록 노력하자. 무엇보다 지금 찾아온 것들을 귀한 손님으로 생각하고 큰 스트레스로 받아들이지 말아야겠다.  그저 삶의 자연스런 통과의례라고 여겨야겠다.

스스로에게 이런 위로의 말을 해본다. “그 정도 살았으면 잘했어, 앞으로도 잘할 거야. 너무 염려하지 마.”  (2023.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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