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삶의 이야기

거인과의 만남, 거인의 이별

박찬운 교수 2016. 4. 2. 09:08

거인과의 만남, 거인의 이별





사진 설명: 겐셔 외상 왼쪽으로 최영애(인권위 상임위원), 서보혁(인권위 북한인권 담당자), 오른쪽으로 김만흠(인권위 비상임위원), 내 옆의 인물은 기억나지 않으나 당시 독일 주재 한국 대사관 담당자였음.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한 인물이 세상을 떠났다. 전 독일 외상 한스 디트리히 겐셔. 89세.


그는 독일 자유민주당(FDF) 사람이지만 동방정책을 추진했던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정부에서 각료로 출발해 슈미트 수상과 헬무트 콜 수상 정부에서 외상(부총리 겸직)으로 일했다. 그 기간이 자그만치 18년. 독일 현대 정치사에서 아마도 최장수 외상이었을 것이다.


독일의 동방정책은 브란트에서 시작되었지만 그것을 현실적으로 집행한 이는 겐셔였다. 그는 헬무트 콜과 함께 통독의 주역으로서 통일 독일의 초대 외상을 지내기도 했다.


내가 그를 특별히 기리는 것은 그가 살아 있을 때 그의 자택을 방문해 직접 면담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2006년 4월 3일이었다. 나는 당시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정책국장 직에 있었는데, 북한인권도 내가 관장하는 업무 중 하나였다. 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과거 서독이 동독의 인권침해에 대해 어떻게 처리를 하였는지를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일로 독일에 가서 분단시절 관련 업무를 했던 책임자를 만나기로 했다. 그 중 한 사람이 겐셔 전 외상이었다.


겐셔의 자택은 본의 외곽에 있었는데, 단아한 모습의 2층 집이었다. 주변은 숲과 넓은 밭이 이어져 고적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인터뷰는 자택 2층 서재에서 이루어졌는데 지금도 인상에 남는 것은 서재의 엄청난 장서였다. 독일 집이 대개 그렇지만 단독주택의 경우 2층은 천정이 매우 높다. 겐셔는 천정까지 빼곡히 꽂혀 있는 서재(한 마디로 책 숲) 한 가운데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노신사는 이곳에서 하루 종일 책을 보고 또 규칙적으로 산책을 한다고 했다. 순간 임마뉴엘 칸트가 생각났다. 그도 이런 서재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다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산책을 했을 것이다.


그날 그와 나눈 대화는 다음으로 미루자. 오늘 꼭 10년 전 그를 만났던 그 순간이 새롭다. 그 기억을 살리는 의미로 여기에 그날 찍은 사진 한 장을 올린다.


겐셔 외상의 명복을 빈다.

(2016. 4.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