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삶의 이야기

만년필과 잉크에 담긴 추억

박찬운 교수 2015. 9. 26. 21:19

만년필과 잉크에 담긴 추억


내 책상 속에는 귀한 만년필 한 자루가 있다. 가격도 꽤 나가겠지만 내겐 추억이 가득 담긴 만년필이다. 나는 그것을 특별한 경우에 사용한다. 내 저서를 누구에게 선물할 때, 마음먹고 손 편지를 쓸 때... 이 만년필에 사용하는 잉크 또한 특별하다. 자그만 치 17년이나 된 잉크다. 살 때도 수퍼 블랙이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그 농도는 더욱 더 진해졌다. 수퍼 수퍼 수퍼 ... 블랙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아주 옛날이야기다. 내가 사법시험 수험생활을 한참 할 때이니 33-4년 전의 일이다. 그 때 내 주변에는 A라는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는 선후배 누구로부터도 최고의 실력자로 인정받던 사람이었다. 나는 운 좋게도 그 선배와 같이 공부하고 함께 잠을 잤다. 그 선배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시험에 합격한 원인을 분석하면 그 중 하나가 그 선배로부터 배운 글쓰기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당시 우리는 2차 시험(논술시험)에서 예쁜 글씨로 깨끗하게 쓴 답안은 그렇지 못한 답안보다 상대적으로 좋은 점수를 받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내가 당시 관심을 가졌던 것은 문장론적 글쓰기가 아니라 단지 채점관이 잘 알아볼 수 있는 명료하고 깨끗한 글쓰기였다.


선배가 가르쳐준 글쓰기에서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것은 정성스런 태도였다. 지금도 그 때의 정경은 오롯이 내 기억 한편에 각인되어 있다.


선배는 2차 시험을 6개월 앞두고 당시 학생 신분으로는 거금을 들여 파커 만년필 2자루(2자루를 산 이유는 시험장에서의 ‘만일’의 사태를 위한 준비였다)를 구했다. 그리고 국산으로서는 최상급이었던 모나미 수퍼 블랙 잉크 한 병을 샀다.


이렇게 준비가 끝나자 그는 잉크병을 연 다음 반투명 얇은 화장지로 덮고 고무줄로 동여맸다. 그리고 그것을 볕이 잘 드는 학습실 창가에 두었다. 3일이 지나니 그 잉크는 반으로 졸아 들어 농도는 처음 것 보다 2배, 3배가 되었다. 선배는 이 잉크를 사용하여 2자루의 파커 만년필을 수시로 길을 들였다.


이렇듯 선배가 2차 시험 답안 작성을 위해 보여 준 정성은 마치 옛날 어머니가 뒤뜰에서 정한수를 떠 놓고 천지신명에게 기도하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나는 선배의 그 모습을 두 말 없이 따랐다. 없는 살림에 용돈을 모아 파커 만년필 두 자루와 모나미 수퍼 블랙 잉크를 샀고 틈나는 대로 그것들을 길들이며 글씨 연습을 해 나갔다.


마지막 선배의 말. "잉크는 한 해로 족하다, 만일 그것이 아깝다고 시험장에서 가지고 오면 시험에 떨어진다"


그의 말대로 나는 2차 시험을 끝내고 운동장 한 가운데로 나가 그 아까운 수퍼 블랙 잉크를 남김없이 쏟아 부었다. 사법시험 아듀!


그 해 나는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 석 자를 발견했다.


내 책상 속의 만년필, 그것은 바로 내 추억을 살려주는 소중한 재산목록 1호다. 오래 전에 나의 삶을 알아주는 귀한 친구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이다. 수퍼 블랙 잉크, 그것은 1998년 헤이그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연수하던 중 옛 추억을 기념하며 마련한 것이다.


오늘 아침 오랜만에 그 만년필에 그 잉크를 넣어 일기를 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광경... 어느 대학 운동장 한 가운데에서 잉크를 쏟고 있는 내 모습이 가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