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삶의 이야기

세월의 무게를 느끼는 아침

박찬운 교수 2015. 11. 18. 10:50

세월의 무게를 느끼는 아침

 

출근길에 우연히 K변호사를 만났다.

 

지하철역에서 천천히 고갯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무척 무거워 보였다. 중절모를 썼지만 흰 머리카락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변호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건강하시죠?”

어이구! 이게 누구여, 박변호사, 아니 박교수 아닌가. 이게 얼마만이지. 한 십여 년 된 것 같지.”

, 제가 이곳을 떠나 학교로 간 지 대충 그렇게 되었네요. 그런데 아침 일찍부터 이곳엔 어인 일이십니까?”

, 이 사람아. 나 아직 변호사야. 재판하러 오는 길이야. 집이 좀 멀어. 아침 일찍 지하철 타고 오는 게 쉽지 않군.”

 

K변호사. 나보다 20년 연상이니 올해 70대 중반의 노인이다. 20년 전 내가 젊은 변호사로 변호사회에서 열심히 일할 때 그는 까마득한 선배였다. 대한민국의 웬만한 법률가라면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달변인데다 풍부한 학식을 자랑했다. 검사시절 일찍이 외국을 다녀와서인지 세상 보는 식견도 다른 변호사와는 격을 달리했다. 그 시절 그의 눈엔 나란 사람은 애송이 변호사 축에도 끼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그 정도의 변호사라면 대체로 누리는 것이었지만 그도 좋은 차를 타고 다녔다. 법정을 오갈 때는 물론 변호사회관에 올 때도 기사가 모는 까만 세단 차가 건물 앞에 서곤 했다. 나는 먼발치에서 그를 볼 때마다, 언제 나도 저런 호사를 누려볼 수 있을까, 변호사라도 다 같은 변호사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나의 무능함이 이유였겠지만, 나는 변호사를 그만두는 순간까지 그런 호사를 누려보지 못하고 변호사 일을 접고 말았다.

 

20년이 지난 오늘 그가 내 앞에 서 있다. 20년 전 그의 나이 또래의 중년신사가 된 내 앞에서 말이다. 화려한 한 시절을 보낸 그였다. 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던 그였다. 어깨에 한껏 힘이 들어갔던 그였다. 말투엔 자신감이, 때론 오만감이 배어있었던 그였다. 그런 그가 오늘 동네 할아버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다.

 

변호사님, 참 세월 빠릅니다.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지났습니다. 제가 변호사님 처음 뵈었을 때가 20년도 훨씬 넘었습니다.”

허허. 그렇지. 세월은 못 속인다. 박변호사 참 젊었었는데, 지금 보니 제법 머리가 희네. 박변호사도 늙어가는 모양이야.”

 

전철을 타고 오면서 생각했다. 나의 20년 후 모습은 또 어떻게 달라질까? 20년 후 어느 후배가 나를 만나게 되면 나를 어떤 모습으로 볼까? 나이와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순간이다.(2015. 1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