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고독과 슬픔

상중 독백

박찬운 교수 2019. 8. 12. 19:06

저의 형 박형운이 지난 토요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안타까운 죽음이었습니다.  저는 3일간 빈소를 지키면서 후미진 복도 의자에 앉아 형을 생각하며 독백하듯 글을 써나갔습니다. 제 마음을 추스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장지를 다녀와 지난 3일을 복기하면서 글을 마무리합니다. 이렇게 사적인 글이 세상에 돌아다니는 것이 좋은 일인지 모르지만 이렇게라도 형을 추모하고 싶습니다.

 

박형운(1957-2019).  충청남도 청양에서 가난한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남. 청양농고를 중퇴하고 1970년대 초 서울로 상경. 군대를 다녀온 뒤 자가용승용차 기사, 개인택시 기사, 사다리차 기사로 일함. 평생 열심히 일했지만 삶은 언제나 가난하고 고통스러웠음. 유순하고 착한 성격의 소유자로 아내와 두 딸을 사랑함. 죽기 전 두 딸을 모두 출가시켰고 손주 둘을 보았음.  2013년경 찾아온 불치의 병으로 6년간 투병하다가 2019년 8월 10일 가족과 형제들이 보는 앞에서 소천. 

 

2019년 8월 10일 새벽 4시
 
조용히 형을 부릅니다. 이젠 의식 없이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형, 불러도 대답 없는 형.
 
이제 몇 시간이 지나면 형을 영영 볼 수 없습니다. 고통 속에서 지낸 형을 이제 영원히 안식할 곳으로 보내드리려 합니다. 
 
형,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63년 살면서 사람대접 제대로 못 받았지요. 공부하지 못한 죄, 가난한 죄로 인해 고통스런 삶을 살았지요. 급기야는 현대의학이 어찌할 수 없는 병마가 찾아와 끝내 일어서지 못했지요. 가고 싶은 데가 많았지만 마음대로 가본 데가 없지요. 부모님의 애틋한 사랑을 받고 산 기억이 없으니 원망 많이 했겠지요. 세상을 향해 소리쳐본 일이 없지요. 부당한 일을 당해도 항의 한 번 한 적이 없지요. 이 모든 게 팔자려니 하면서 체념하며 살았지요.
 
나는 신이 있다면 항의하고 싶어요. 왜 형을 이런 세상에 보냈나요. 왜 형을 불행의 연속 속에서 살게 했으며, 왜 그렇게 비참하게 삶을 끝내게 했는가요. 이것도 신의 계획이었는가요. 아픔, 고통, 죽음의 연속 속에서 무언가 깨닫게 할 것이 있었는가요. 왜 이 쓴 잔을 그토록 오랫동안 주었는가요.

 
8월 11일 새벽 4시
 
형은 갔습니다.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인공호흡기를 제거했습니다. 어제 오전 10시15분. 연명장치가 제거되자 형은 순식간에 모든 생명활동을 정지했습니다. 10시 35분 맥박이 제로가 되었습니다. 10시 38분 의사는 형의 사망을 선언했습니다.
 
올 5월 19일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3달이 안 되어 다가온 두 번째 상입니다. 가족들은 슬퍼하지만 한편으론 형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그만큼 지난 몇 년 간이 고통스러웠다는 것이지요.

아내와 자식의 슬픔만큼 형제의 슬픔도 큽니다. 어쩜 그게 자연스러울지 모릅니다. 아내도 자식도 모르는 형의 삶을 아는 게 형제니까요. 형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은 아내와 자식보단 형제인 내가 잘 아니까요. 불쌍한 형...
 
나는 빈소 옆 의자에 앉아 옛날 일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여러 가지 한이 있습니다. 우리 형제는 자주 만나지 못했습니다. 만나도 살가운 이야기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밥이나 먹고 몇 마디 일상적 이야기나 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60년 가까이 형과 동생이란 연을 맺고 살았지만 내가 형과 주고받은 이야기가 도대체 몇 시간이나 될까요. 생각하면 참으로 한스럽습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형과 나와의 삶의 간극이었을 겁니다.

혈육이란 것을 빼면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배움의 정도에서 나오는 인식의 차이, 거기에서 비롯한 삶의 방식의 차이는 생각보다 컸습니다. 종교, 철학, 정치 어떤 것도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있어도 다른 꿈을 꾸었습니다.
 

8월 11일 오후 5시

형과 마지막  작별을 했습니다. 핏기 없는 형의 얼굴을 보자 형수와 딸들은 오열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게선 눈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형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형이 관속으로 들어가고 뚜껑이 닫히는 순간 여기저기에서 울음이 터졌습니다. 그럼에도 나의 눈에선 눈물이 쏟아지지 않았습니다. 눈물이 마른 것일까요.

입관의식이 끝나고 조용히 장례식장 후미진 복도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 때서야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형, 잘가요...


딸들의 바람대로 형을 수목장으로 모셨다.

 

8월 12일 저녁 7시

10시 45분 인천시립승화원 3번 화로 속으로 형은 들어갔습니다. 화로문이 닫히자 형수와 딸들이 웁니다. 함께 온 가족들이 하나 둘 따라 울기 시작합니다. 

김포 문수산 어느 소나무 아래에 형의 유골을 묻었습니다. 때 맞추어 비가 대지를 적시니 묻자마자 재는 흙이 될 것 같습니다. 이젠 흙이 형입니다. 이젠 저 나무가 곧 형입니다.

이렇게 해서 지난 사나흘의 황망한 시간이 끝났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생에서 형과 나의 인연은 끝이 났습니다.

병원으로 돌아가 주차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두 눈에선 연신 눈물이 흘렀습니다. 소리 내 울었습니다. 형이 간지 사흘만에 처음으로 소리 내 울었습니다. (2019.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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