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5. 18. 광주민주항쟁 41주년 기념일이다. 개인적으론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2주기가 되는 날이다. 이 글은 아버지 기일을 맞아 그 영전에 바치는 일종의 사부곡(?)이다.
아버지는 89세로 세상과 작별했다. 비록 작고 2년 전에 발생한 암으로 고생을 하다가 가셨으나, 한국 남성 평균수명을 생각하면, 장수하신 것이라 생각한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시 국군 장교로 참전한 국가유공자로, 젊은 시절엔 시골 면장을 했고, 70년 대 초 상경한 이후엔 이런저런 일을 했지만, 제대로 벌이를 하지 못해 늘 생활고에 시달리셨다. 그런 이유로 슬하에 5남매를 두고서도 제대로 교육을 시키지 못해 평생 가슴에 한을 남기셨다. 그 속에서도 나는 운 좋게 교육을 받았다. 다른 형제의 복을 빼앗았는지, 변호사, 교수, 박사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평생 자식인 나를 특별히 여기셨다. 어딜 가서도 아버지는 자식(나) 자랑을 하셨고 그것이 아버지의 자존심이었다. 그럼에도 나와 아버지의 관계는 무 덤덤 그 자체였다. 나는 아버지 생전에 한 번도 살갑게 아버지를 대한 적이 없는 불효자다. 밖에선 그렇게 말 많은 자식이 아버지 앞에 가면 말수가 적었다. 그저 꼭 해야 하는 말 외엔 하지 않았고, 더욱 가관은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 십 여 년은 곧잘 아버지와 싸우기까지 했다.
레드 콤플렉스(아버지야 국군 장교 출신이니 레드 콤플렉스가 있을 리 없지만 어머니 쪽이 좌익이었음)로 평생을 사신 아버지가 자식 다칠까 하는 노파심에 ‘나서는 일 하지 마라’ 하시면, 그저 ‘알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라고 넘겨도 될 것을 ‘저는 그리 살지 않습니다’ 라고 말해 아버지의 마음을 긁어놓았다. 아버지가 어디서 받았는지 대한민국 망할 것 같다면서 유튜브 영상을 카톡으로 보내실 때면, ‘어떤 놈들이 아버지에게 이 따위 가짜뉴스를 보냈느냐’고 따져 물으며 아버지를 무안케 만들었다.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년이 되면서, 요즘 내 꿈에 나타나신다. 그런데 아버지의 모습이 과거와 다르다. 과거와 달리 아버지를 보면 그냥 눈물이 나고 그리워진다. 나이 60이 되어서야 철이 든 모양이다. 내가 아버지를 많이 닮은 것을 이제야 아는 것이다.
아버지는 잘 생긴 얼굴에 정력적인 분이었다. 큰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단단한 골격의 소유자였다. 에너지가 넘쳐, 어린 시절부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몸을 쉬지 않고 움직이셨다. 늘 하루에 만보를 걸었고 배드민턴을 즐기셨다. 아버지는 젊은 사람과 팔씨름을 해도 지는 법이 없으셨다.
생각해 보니, 내가 그 피를 이어받았다. 키가 작은가? 얼굴이 빠지는가? 몸이 부실한가? ㅎㅎ 몸과 정신은 분리할 수 없으니 몸의 자신감은 정신의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아버지는 내게 할 일을 다 하신 분이다.
아버지는 호기심이 많으신 분이었다. 배우기를 좋아해 80이 넘어서도 신문에 알기 어려운 외래어가 나오면, 나에게 그 뜻을 꼭 물어보셨다. 죽을 병에 걸려 병원 예약을 잡을 때도 ‘그 날은 컴퓨터 배우는 날이라 안 됩니다’라고 말씀하실 때는 나도 속으로 놀랐다. 80대 후반에는 드디어 스마트 폰과 카톡을 배워 자식들에게 매일같이 사진과 동영상을 보내셨다.
생각해 보니, 내가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 내가 항상 이런 말을 하지 않는가. ‘나는 알고 싶고 느끼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저런 모습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아버지는 정의감이 남다른 분이셨다. 국군 장교 출신으로 국가유공자라는 자부심이 있으셨고, 리더십도 좋아 어느 자리에 가서도, 뒤에서 험담만 하는 분이 아니셨다. 큰 일을 할 기회는 없었지만 동네의 대소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팔순이 넘은 뒤에도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회장, 노인회장을 맡아 노익장을 보여주셨다. 부정을 참지 못하시고 잘못을 발견하면 시정을 요구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수사기관에 고발장을 직접 쓰셨다. 아들에게 그것을 보여주면 응원은커녕, 열이면 열, ‘아버지 제발 그런 일 하지 마세요‘라고 핀잔을 받으면서도 그 고집은 돌아가시기 몇 달 전까지 계속되었다.
내가 이런 피를 받은 게 아닌가. 아버지와 하는 일이 다를 뿐 본질은 같지 않은가?
새벽잠이 없어 누고보다 일찍 일어나 일을 하고, 매일 15층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는 단단한 다리를 갖고 있으며, 한번 일에 빠지면 고도의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이 나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아버지의 삶 그 자체이다. 나는 아버지의 그것을 보고 조건반사적으로 싫어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삶도 아버지의 그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을 발견한다. 이것이 나의 팔자요 운명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그것을 알았다. 효도 한 번 제대로 못한 자식이 뒤 늦게 조용히 울면서 말한다. 나는 평소 사랑이라는 말을 잘 하지 못한다. 여인한테도 함부로 쓰지 않은 말이다. 그런데 오늘 이런 말을 한다. “아버지 사랑합니다.”(2021.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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