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시간 새벽 4시 한잠 자고 나니 머리가 맑다. 어젠 하루 종일 우울한 기분으로 보냈더니 밤이 되자 머리까지 아팠다. 어제 아무 일이 없었다면 나는 밤비행기를 타고 지금쯤 필리핀 클락 공항에 도착해 제부가 모는 차로 동생 집을 향하고 있을 것이다.
어제 오전 조카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시내 백화점에 나갔다가 가족 단톡방에 문자 하나가 올라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형수가 올린 것이었다. “형이 위독해요.”
형은 이미 작년부터 몇 번 위기를 넘겼다. 지난 5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위급한 상황이 왔다. 고비를 넘기기 힘들 것이라 생각해 가족들은 마음 준비를 했었다. 그런데 용케 그 위기를 넘겼고 그 사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5남매 중 누구도 부모보다 먼저 가지 않았으니 최소한의 효도는 한 것이다.
밤비행기를 포기하고 형이 있는 인천의 한 병원으로 달렸다. 중환자실에서 형을 만났다. 요양병원에서 심정지가 왔고 종합병원 응급실로 옮기는 과정에서 이미 뇌기능을 상실했다. 눈동자도 풀려 무슨 말을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가까스로 숨을 쉬는 형을 한동안 바라보다 병실을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입에선 그저 “형... 형...” 이 말만 나왔다. 마지막 작별치곤 시시하기 그지없는 동생의 인사말이었다.
나의 형, 나보다 다섯 살이 많으니 올해 63세. 그가 이제 한 많은 이승에서 영원한 저승으로 가려한다. 어렵게 버텨온 인생이다. 한 핏줄로 태어났지만 동생과는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 삶이었다. 나는 세상의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알아가면서 살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인생이지만, 형은 그러지 못했다. 60년 넘게 살면서도 세상의 좋은 것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했고, 세상으로부터 인정 받지 못했다. 아슬아슬한 인생 고비를 넘기는 가운데서 자식을 키우며 살았다. 이제 그 자식들이 결혼을 해, 두 명의 손주를 낳았고 곧 세 번째 손주를 보게 되는데, 형은 할아버지 노릇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간다. 내 마음에 진한 상처를 남기고...
2년 전인가, 병상에 누워 있는 형을 보면서 안쓰러운 마음에 글을 하나 썼다. 형의 삶을 사실 그대로 옮기기엔 보는 눈이 많아 소설로 썼다. 이 짧은 소설을 쓰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싱크로율 80% 이상이니 소설 아닌 소설이다.
나와 형의 이야기를 이런 공간에 이렇게 올려도 될까.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이 공간도 사람 사는 곳 아닌가. 이런 사람도 있다는 것쯤은, 잘 나간다는 박교수에게도 이런 아픔이 있다는 것쯤은... 사람들이 그것을 안다고 해서, 무엇이 그리 나쁜 일이겠는가.(2019. 8.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