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결심

새로운 결심-법률 실무가 정체성 회복을 위해 법서와 씨름하기-

박찬운 교수 2024. 11. 16. 19:37

새로운 결심

-법률 실무가 정체성 회복을 위해 법서와 씨름하기-

 
세상이 어지럽다.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다.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가 정권 퇴진을 외치고 있다. 나도 언제 몸을 일으켜야 할지 목하 고민하면서도 골방에 앉아 책장을 넘긴다. 지금 이 시기 내 할 일은 이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근 큰 결심을 했다. 법률 실무가의 정체성을 회복하기로 하고 일대 용단을 내렸다. 무슨 말이냐고? 변호사 활동을 위한 기본지식 재무장에 나선 것이다. 실무가에게 제일 필요한 법률 지식을 높이기 위해 민법 교과서를 출발점으로 변호사 시험 과목 전체 교과서를 앞으로 몇 달간에 걸쳐 읽기로 했다.
 
법률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선 강의와 시급히 써야 할 논문 집필 외엔 거의 모든 시간을 법서와 씨름해야 한다. 제2의 고시 공부라고 해도 좋다. 민법 교과서를 도서관에서 가져다 대충 면수를 확인하니 5권 4천 쪽이 넘는다. 법학도 사이에서 제일 인기가 있다는 단행본 민법 교과서는 2천 쪽에 가깝다. 상법, 민소법 등 사법 관련 교과서와 헌법, 행정법, 형법, 형소법 등 공법 관련 교과서를 전부 읽는다면 그 분량이 어림잡아 최소 1만 쪽이다. 물론 한 번만 읽어서 될 일도 아니다. 필요하면 두 번 세 번 읽어야 한다.
 
나는 도대체 정년 몇 년을 앞두고 왜 이런 무모한 계획을 세웠는가. 내겐 이것이 정년 이후를 대비한 준비라고 생각한다. 정년 이후 한정적 범위 내에서라도 변호사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잠자고 있는 법률 실무가의 정체성을 깨울 필요성이 있다. 그 정체성 회복은 법학의 기초가 되는 기본법의 이론과 실제를 적정한 정도로 습득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민사법 이론과 판례, 가장 기본적인 형사법 이론과 판례, 가장 기본적인 공법 이론과 판례를 모르고서야 어찌 변호사라 할 수 있을까. 그것도 모른 채 변호사 명함을 내미는 것은 내 양심상 허락할 수 없다.
 
내가 이런 공부를 시작한 것은 만 40년 만의 일이다. 1984년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이어서 사법연수원 2년 과정을 끝냈다. 이후 군대에 다녀와 15년 간은 변호사로, 20년 간은 교수와 공무원 생활을 했다. 지난 35년간 법률가로 생활해 왔지만 내 관심 분야와 전공에 국한해 공부를 했을 뿐 그 외 분야에 대해선 공부할 겨를이 없었다(물론 나는 법률 외 영역에서 비교적 다양한 공부를 해왔다). 변호사 생활 기간에는 그래도 사건 처리를 위해 전공법 분야를 떠나 여러 분야에 관심을 두고 공부했지만 교수가 되고 나서는 그러지 못했다. 교수 부임 초기 얼마 동안은 여러 학술 모임에 나가 기존 교수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실무가 출신임을 내세우며 전공에 개의치 않고 토론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런 모습도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변하더니 나도 어쩔 수 없이 전공을 존중하고 전공 내에서만 활동하는 교수가 되고 말았다. 20년을 돌아보니 나는 특정 분야의 연구자지 더 이상 다양한 사건을 처리할 수 있는 실무가가 아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로스쿨 도입 이후 변호사 자격 교수들에 대해 실무를 경험할 수 있는 길을 원천 봉쇄한 제도도 한몫했다.
 
나는 정년 이후 법조 실무로 돌아가 돈 버는 일반 변호사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인권법 교수로서 정년 이후에도 그 분야의 연구를 계속해 나갈 것이다. 다만 나의 인권법은 실천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 그저 연구하는 것으로만 끝날 분야가 아니다. 인권법은 종국적으로 실무를 통해 실천하지 않으면 그 존재의의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인권침해가 발생했을 때에는 사법적이든 비사법적이든 구제 절차에 직접 뛰어들어야 현상을 바꿀 수 있다. 인권법에 능하면서도 법률 실무에 밝은 법률가가 이럴 때 필요하다. 나는 정년 이후 일정 기간 이런 일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싶다. 좋아하는 여행을 하고 저술 작업도 하겠지만, 틈나는 대로 (극히 한정된 사건의 해결을 위해) 연구실을 벗어나, 법원으로 헌재로 혹은 인권위로 뛰어갈 것이다.
 
이를 위해선 인권법 연구자라는 정체성만으론 부족하다. 법률 실무가라는 정체성을 겸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서 법률 실무가에게 필요한 기본법의 이론과 실제(판례)를 새롭게 공부하고자 한다. AI 시대인 만큼 예전처럼 암기하듯 공부할 필요는 없지만 이 문명의 이기를 법률실무에 적극 이용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춰야 한다. 기억력이 많이 나빠져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는 것이 힘들지만 그대신 이 작업이 내게 새로운 활력을 줄 것이라 믿는다.
(2024.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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