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LUND의 이곳저곳

LUND의 이곳저곳(1)-기억을 더듬으며-

박찬운 교수 2023. 9. 10. 05:41
룬드를 대표하는 룬드성당

 
룬드는 내게 특별하고, 이곳을 거쳐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특별한 곳이다. 다만 사람들이 그 진가를 몰라보는 것이 안타깝다. 룬드는 고색창연한 아름다움 속에서도 새로움이 넘치는 도시다. 도시 곳곳에 아직도 중세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곳, 그러면서도 현대문명의 이기를 어느 도시보다 즐길 수 있는 곳, 바로 그곳이 룬드다.
나는 이곳에 사는 동안(2012년 여름-2013년 여름) 시간이 있을 때마다 시내 곳곳을 누비면서 룬드의 속살을 보려고 노력했다. 내게는 그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추억이다. 나는 그 추억을 잊지 않으려고 가는 곳마다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것에 내 나름의 설명을 붙이려고 이 자료 저 자료를 찾았다. 세월이 지나면 아무리 좋았던 추억도 기억 저편에서 사라지는 법, 그러나 룬드는 내 기억에서 오래 동안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이런 사진첩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내 나름의 룬드를 기억하는 방법으로 이 사진첩을 만들었다. 그리고 룬드를 기억하기를 원하는 이들을 위해 이 사진첩을 선물로 제공한다. 부디 이 사진첩을 보면서 룬드를 기억하고, 룬드를 사랑하길 바란다. 그리고 더 큰 바람이 있다면 이런 도시가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도 만들어지길 소망해 본다.

[룬드의 역사]

 사진첩만으로 룬드를 기억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사진과 함께 룬드의 역사를 머리 속에 넣을 수 있다면 룬드를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내가 쓰는 룬드에 대한 짧은 역사이다.
 룬드가 언제 시작한지는 사실 정확하지 않다. 다만 학자들은 대체로 10세기부터 스웨덴 남부 스코네 지방에 모습을 나타냈다고 한다. 룬드의 역사에서 설명하지 안될 중요한 순간들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자.
 

룬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지역의 대략적인 지리를 알 필요가 있다. 룬드는 스웨덴 남단에 위치한다. 기차로 10분 거리에 스웨덴 제3의 도시 말뫼가 있고 거기에서 기차를 타면 바로 20분도 안 돼 코펜하겐 중앙역에 도착한다. 물론 말뫼와 덴마크는 다리(외레순)로도 연결돼 있다. 코펜하겐에 직장이 있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스웨덴의 말뫼나 룬드에 살면서 출퇴근을 한다.

 
 1. 룬드는 17세 중반까지 덴마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도시였다.
룬드는 덴마크로부터 좁은 해협을 건너면 바로 닿을 수 있는 곳이며 이곳에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여러 곳으로 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따라서 덴마크가 스칸디나비아 전역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될 도시였다. 지정학적 위치가 룬드의 오랜 역사를 가능케 했던 것이다.

 2. 룬드는 덴마크 최고의 종교도시였다.
룬드에 12세기 초 룬드성당이 만들어진 것은 덴마크 왕가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중세 시절에는 가장 큰 성당이 있는 도시가 당연히 그 지역의 중심도시가 되었고, 정치권력은 거기에서 나왔다. 덴마크는 가장 중요한 도시라고 생각한 룬드에 가장 큰 성당을 세움으로써 스칸디나비아의 맹주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1123년 룬드에는 북구 최대의 성당이 세워지게 되었다. 중세시절 이곳은 대주교가 있는 북구 가톨릭의 중심이었다. 한 때 27개의 성당과 수도원이 이 룬드에 있었다고 한다. 베네딕투스 수녀원, 알헬고나 수도원, 프란체스코 수도원 등이 이곳에 들어 와 활동했다.

 3. 종교개혁은 룬드의 모습을 일거에 바꾸어 놓았다
1519년 루터의 종교개혁은 유럽 사회 전체에 회오리 바람을 일으켰다. 마침내 덴마크는 1536년 신교국가로 변모한다. 그렇게 되자 룬드는 하루 아침에 북구 최대의 종교도시라는 명성을 잃게 된다. 신부와 수녀는 쫓겨 났고, 대부분의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은 문을 닫았다. 룬드 한 가운데에 있는 룬드성당은 루터교회로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4. 스코네 지역이 마침내 스웨덴 왕가의 영지가 되다.
17세기 들어와 스웨덴은 점점 강력해지고 덴마크를 남쪽으로 밀어내기 시작한다. 마침내 1658년 로쉴드 조약에 의해 덴마크는 스코네 지역을 스웨덴에 내준다. 스웨덴 왕가는 스코네 지방을 차지하자 마자 이 지역을 완전한 스웨덴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5. 룬드대학이 세워지다.
스코네 지역을 완전히 스웨덴화 하기 위해 스웨덴 왕가는 1666년 룬드에 대학을 설치한다. 이미 북쪽에는 웁살라 대학이 있었는데, 구스타프 왕가는 남쪽에도 그와 비슷한 대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로서 룬드대학은 스웨덴의 두 번 째 universitet의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 룬드대학은 북구의 이름 없는 조그만 대학으로 남아 있었다. 19세기에 이르러 유명 교수들이 룬드에 들어 오기 시작했고, 학생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북구 최고의 시인이자 고전학자인 이사이아스 테크너도 그 즈음 룬드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6. 19세기 중엽 스웨덴의 산업혁명은 룬드를 변모시켰다.
스웨덴 산업혁명은 룬드 지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주변에 공장과 회사가 들어서면서 룬드에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1856년 룬드에 철도가 들어오면서 인구의 유입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이것은 룬드에 건축붐을 일으키고 말았다. 룬드대학은 본관 건물을 지었고, 룬드성당은 대대적 보수에 들어갔다. 이 공사의 책임은 젊은 건축가 헬고 제터발이었다.
아쉬운 것은 이 개발 과정에서 중세 룬드의 모습이 많이 손상되었다는 사실이다. 철도가 과거 룬드의 성곽 안으로 들어 와 도시를 관통하고 만 것이다. 클로스터가탄에서 말하는 클로스터가 지금의 수도원교회(Klosterkyrkan)를 말하는 것인데 철도로 말미암아 교회로 가는 길이 끊어지고 말았다. 아주 애석한 일이었다.

 7. 20세기 들어 와 룬드대학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룬드대학은 20세기 들어 와 북구 최대 대학으로 성장했다. 웁살라 대학과 함께 북구를 대표하는 연구중심대학이 되었다. 현재 룬드의 인구는 11만 명 정도인데 그 중에서 약 8만명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대학과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20세기의 룬드는 룬드대학을 위한, 룬드대학에 의한, 룬드대학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