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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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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2015.09.27

통진당 해산결정 중 국회의원직 상실판단에 관한 나의 생각

[통진당 해산결정 중 국회의원직 상실판단에 관한 나의 생각]통진당 해산결정으로 한국 민주주의는 중대기로에 섰다. 이에 대한 나의 입장은 명확하다. 있을 수 없는 결정이다. 그런데 결정 중 국회의원직 상실판단은 해산결정과 달리 법률적 각도에서는 더욱 큰 문제를 안고 있다. 해산결정은 법률적으로 보면 헌재의 권한사항이니 동의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우길 수 있지만, 국회의원직 상실부분은 헌재의 권한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그 판단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하면 헌재로서도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통진당 국회의원들은 행정재판으로 '국회의원지위확인' 소송을 제기한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일부 언론에서는 그 소송은 제기되자마자 각하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고, 법률가들 사이에서도 이 소송이 ..

내가 본 대한민국 (나는 국민이기에 앞서 인간으로 살고 싶다)

내가 본 대한민국 나는 국민이기에 앞서 인간으로 살고 싶다 나는 가끔 대한민국 사회에서 사는 게 숨이 막힌다. 나는 자유롭게 살길 원한다.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말하고 싶을 때 말하고, 쓰고 싶을 때 마음대로 쓰고 싶다. 나는 그것이 인간존재의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자유가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대학시절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우리 사회에서 이 기본적 자유가 시시때때로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변호사가 된 이후에는 불온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불온한 책을 보았다는 이유로, 집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간 이들을 위해 변호하기도 했다. 누구는 말할 것이다. 우리는 분단된 사회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자유의 제한은 감수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그래도 우리는 북..

내가 본 대한민국 (지식인의 책무)

내가 본 대한민국 지식인의 책무 이 새벽, 가슴에 손을 얹고 떨리는 맘으로 말한다면, 나는 철이 들고 나서부터 지금껏 진실되고 성실한 사람이 되려했고, 세상에 조금이라도 이로운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 하기야 좋든 싫든 지식인으로 어느 정도 책임감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런 맘을 갖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으랴 만은.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 대체로 이런 맘은 균열이 가고, 자주 잊기 일쑤다. 일상은 나태로 시들고, 하지 않던 실수마저 하나 둘 늘어가는 법이다, 그게 인생인 걸 어찌하리. 따지고 보면 지식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한 사회가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도 개인적으로는 행복해야 하고, 즐거운 인생을 살아야 한다. 지식인에게 아무리 애국을 강조한다고 해서, 부부싸움을 하는 중에 (애국가가 들..

내가 본 대한민국 (제발, 이젠 더 이상 죽이지 말라!)

내가 본 대한민국 제발, 이젠 더 이상 죽이지 말라! 나는 이 새벽에 왜 이런 글을 쓸까? 누가 본다고... 또 누가 이것을 본들 무엇이 바뀐다고... 이 시간에 책이나 읽지... 그 시간에 논문이나 쓰지...그럼에도 나는 가족들 다 잠자는 이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쓴다. 어둠 속에 고함이라도 지르면 조금 답답한 마음이 뚫릴 것 같은 심정으로 글을 쓴다. 비록 메아리 없는 함성일지라도 나는 지르고 또 지른다. 야! 대한민국! 제발, 좀 바뀌어라!------“서울의 어느 달동네에서 사는 A모녀가 방안에 연탄불을 피워놓고 자살했다. A는 남편과 이혼하고 중학교에 다니는 딸을 혼자 키웠다. 그녀는 어느 빌딩의 청소원으로 어렵게 생계를 유지해 왔으나 최근 그것마저 할 수 없게 되었다. 청소용역회사에서 비정규직었던..

내가 본 대한민국 (나는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고 싶다)

내가 본 대한민국 나는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고 싶다 “복지국가를 이야기하려면 몇 십 년 앞을 내다봐야 하지만 한국은 당장 앞에 보이는 몇 년에만 관심이 있어 보인다. 이유는 분명하다. 국민의 표만 의식하기 때문이다. 국민이 안심하고 세금을 내고, 그 이상으로 돌려받을 수 있다는 신뢰의 정치를 만들지 못하면, 결국 복지는 국민의 부담만 가중시키고 사회는 빚더미 위에 올라 산산이 조각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최연혁, 『우리가 만나야할 미래』, 282쪽) 이 책을 쓴 최연혁 교수는, 한국인으로서는 드물게 스웨덴에서 교수생활을 하는 분인데, 현재 남스톡홀름 대학의 정치학 교수로 일하고 있다. 이 책은 필자가 오랜 기간 스웨덴에서 학자생활을 하면서 정치인을 비롯한 많은 스웨덴 시민을 직접 만나 인터..

변호사회 회장 선거를 보며

변호사회 회장 선거를 보며 요즘 변호사회가 선거기간 중이다. 2년간 변호사 단체를 맡을 새로운 리더십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한마디하고 싶은 것은 후보자들의 공약에 관한 것이다. 전국변호사단체의 최상급단체인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후보와 전국 변호사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서울변호사회 회장 후보들이 대부분 페친인 관계로 이분들의 선거공약을 나는 매일 같이 대한다. 그런데 후보자들 공약 중 한가지 애석한 것은, 이익단체로서의 공약은 넘치지만, 공익단체로서의 변호사단체로 인정받기 위한 공약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변호사를 해온 내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요즘 변호사들의 삶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게 사실이다. 법률수요를 고려하지 않은 변호사 수의 급증이 가장 큰 이유이다...

사법시험 존치를 할 것인가 폐지를 할 것인가

사법시험 존치를 할 것인가 폐지를 할 것인가 요즘 이 문제가 시끄럽다. 최근 대한변협회장 선거(직선)에서도 큰 쟁점이 되었고, 사시존치를 공약으로 내건 하창우 변호사가 당선되었으니 앞으로 더 논란이 될 것 같다. 홍준표 경남지사도 사시는 희망의 사다리라고 하면서 존치론에 힘을 싣고 있다. 국회에는 사시존치를 위한 수 개의 법안이 계류 중이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입장을 개진한다. 1. 사시존치의 이유인 '희망의 사다리'론에 대하여 우리 사회는 지금 양극화가 극심하다.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은 OECD 국가 중 선두 그룹에 속한다. 이 양극화는 점점 구조화되고 있어 빈곤계층의 계층간 이동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상황에서 계층이동의 방법으로 그간 사시가 해왔던 기능을 인정해야 한다. 로스쿨 체제는 기..

장 자크 루소의 집을 찾다

장 자크 루소의 집을 찾다 오늘 오랜만에 집에 일찍 들어오니 할 일이 없다. 컴퓨터를 켜 몇 년 전 찍은 사진을 본다. 눈에 들어오는 사진 몇 장! 이 사진을 페친들에게 소개 좀 해야겠다. 나는 어딜가도 호기심이 많다. 남들 안간 곳을 찾아가는 습벽(!)이 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추억이 많다. 나만의 비밀이다. 꼭꼭 숨겨 놓았다가 죽기 전엔 풀어 놓고 가야 하는데 그럴 수 있을 지 모르겠다. ㅎㅎ 2012년 10월 제네바에 갔다. 제네바 유럽 유엔본부에선 인권회의가 많이 열린다. 나는 NGO 대표로 지난 20년간 여러 차례 그곳에 가서 인권활동을 해왔다. 그 해도 그런 이유로 한국의 인권운동가 몇 명과 함께 그곳을 방문했다. 2006년에 유엔인권이사회가 만들어진 이후 유엔 회원국은 정기적으로 인권상황..

옛 이야기 그리고 박상옥 후보자가 대법관으로 부적합한 이유

방금 전 한강을 넘어왔다. 창문 밖으로 펼쳐지는 서울이란 거대도시, 이곳에서 나는 40년을 넘게 살았다. 그럼에도 서울이란 곳은 여전히 내겐 낯선 도시다. 잠시 눈을 감았다. 웬지 오늘은 옛날 생각이 발길을 잡는다. 2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0년 가을의 일이다. 나는 변호사 초년생으로 그날 밤 한참 선배인 C 변호사님과 연수원 동기인 Y 변호사와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거기서 나온 말. “박 변호사, 변협회장 박승서 변호사가 강민창을 변호한 것 알아?” 금새 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라고요. 변협회장이 박종철군 사건 은폐주모자인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변호했다고요?” 이 대화는 나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였다. 그 다음날로 나는 박승서 변협회장의 퇴진 운동을 주도했다. 직접 퇴진 성명문을 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