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사상

이 시대의 사상가가 쓴 동화 <엄마는 어디에>

박찬운 교수 2023. 6. 6. 10:52

 

https://www.youtube.com/live/idn-WxgETZ4?feature=share

2023. 6. 10. 서초동에서 이도흠 선생의 북콘서트가 있었다. 이 북콘서트를 통해 저자는 자신의 눈부처 철학을 짧은 시간에 설명했다. 특강이 끝난 뒤에 나도 출연해 잠시 이선생을 소개하고 소감을 이야기했다.

 

휴일 새벽에 일어나 숙제 하나를 끝냈다. 한양대 이도흠 교수가 생애 최초로 쓴 동화 <엄마는 어디에>를 읽었다. 읽고 나니 이것이야말로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할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아동을 위한 책이지만 그보단 어른용 동화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이 시대의 사상가 이도흠 교수의 모든 철학이 동화의 형식과 표현으로 압축되었으니 말이다.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이도흠을 소개해야겠다. 수년 전 나는 그의 대저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를 읽고 리뷰를 쓰면서 이렇게 그를 소개했다.

이도흠. 한양대 국문과 교수. 그는 지난 30년간 국문학의 본향인 향가를 연구하면서 그 깊은 세계에 다가가기 위해 불교, 그중에서도 원효 공부에 매진했다. 그렇게 해서 원효의 화쟁사상을 집대성했고 수많은 불교관련 논문을 상찬함으로서 이 나라의 우뚝 선 불교연구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고 그는 젊은 시절부터 마르크시즘을 연구한 외에 지칠 줄 모르는 독서력으로 서양현대철학을 두루 섭렵했다.

연구자로 살아오면서도 그는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상임의장을 역임하며 자본에 의해 죽어가는 대학을 살리기 위해 끊임없이 저항했고, 4대강 사업, 쌍용자동차 노동자 정리해고, 밀양송전탑 등등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시위대 맨 앞자리를 지키며, 때론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과 몸싸움을 하기도 했고, 때론 거리에서 무도한 정권에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지금 그는 대안대학의 이사장으로 새로운 교육실험을 하고 있고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로 불교 개혁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그를 거리의 인문학자라 부른다.”(박찬운, <궁극의 독서>, 193-194)

 
<엄마는 어디에>는 이도흠의 눈부처(당신 눈 안의 나) 사상과 공감 협력 교육론을 연어 오누이들의 시점으로 꾸민 것이다. 아리, 마리, 이든 세 오누이는 보드라운내에서 태어나 엄마를 찾아 무지큰난바다의 고래넘실바다로 나갔다가 얼움둥둥바다와 명태득시글바다 그리고 눈펼펄섬을 거쳐 다시 보드라운내로 돌아온다. 이 과정에서 사랑하는 형제와 친구, 스승을 잃고 이별하면서 슬픔의 눈물을 흘린다. 이들에겐 만나는 모든 이들이 스승이지만 그중에서도 슬기샘(새미)은 특별한 스승이다. 슬기샘을 통해 참다운 연어의 삶이 무엇인지를 배운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슬기샘은 다름 아닌 저자 이도흠이다.

슬기샘은 세 오누이를 비롯해 연어사리들을 모아 놓고 학교를 만든다. 이름하여 슬기샘학교. 거기에서 많은 것들을 배우는데 처음엔 살아남는 법을 다음엔 잘 사는 법을 배운다. 슬기샘이 가르친 잘 사는 방법이 바로 저자의 눈부처 사상과 공감 협력 교육론이다.

동화에 나오는 눈부처 사상을 작가의 입으로 직접 들어보자.

“상대방에 다가가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 거기에 내 모습이 담겨 있고 내 눈동자엔 그가 담겨 있듯이 당신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당신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생명의 괴로움과 아픔을 자신의 것처럼 아파하며 그의 손을 잡고 함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사람다운 일입니다.” (작가의 말)

 
눈부처 사상은 슬기샘의 이런 말로도 나타난다.

“다른 물고기의 괴로움과 아픔으로 내 것처럼 아파하는 것이 여러분의 본래 마음이자 가장 물고기다운 마음이에요,” (77)

 
작가가 동화를 통해 말하는 교육론은 경쟁 일변도의 우리 교육체제를 염두에 둔 것이다. 1등 외엔 모두를 패배자로 만드는 경쟁중심주의 교육이 우리 삶을 질곡으로 빠트리고 있다. 경쟁중심 교육은 승자독식을 당연시 여기는 교육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해방되지 않는 한 우리에겐 희망이 없다. 우리 모두가 1등이 되는 교육, 서로를 밟고 일어서는 교육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돕는 공감과 협력의 교육은 정녕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슬기샘은 이렇게 말한다.

“누구에게든 1등을 할 수 있는 재능이 숨어 있고, 그 재능은 똑같이 소중해요. 우리가 그동안 제일 잘났다고 여긴 물고기도 못하는 것이 아주 많고, 가장 못났다고 생각한 물고기도 잘하는 것이 아주 많아요. 여러분은 이제부터 누가 누구보다 더 낫다는 말일랑 결코 하지 마세요. 아니,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아요. 여러분은 누가 더 낫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모두 고르게 똑 같은 물고기입니다.” (64-65)

“슬기샘 교실에서 잘한다는 것은 홀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벗들과 어울려 무엇인가 함께 이루어내는 힘을 뜻했습니다. 모두가 이긴 물고기이고 모두가 잘했고 모두가 즐거웠습니다.” (83)

 
이 책에선 슬기샘의 교육관을 통해 선생과 부모의 길이 제시된다. 선생이라면 부모라면 새겨들을 말이다.

“여러분! 저 도토리를 보세요. ... 땅에 떨어진 도토리는 저리 작아도 우리 몸보다 수백, 수천 배나 더 큰 떡갈나무로 자랍니다. 이 작은 도토리 안에 커다란 떡갈나무로 자랄 수 있는 것들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 선생님은 여러분 안에 숨겨진 것들이 떡갈나무처럼 자랄 수 있도록 가르침을 펼 것입니다.” (65)

 
이런 교육을 할 때에만 비로소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그것이 진짜 아이들을, 우리들을 잘 살게 하는 교육이다. 저자의 말대로 “잘 살려면 우리는 이 물속 세상을 사랑과 우정이 넘치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 동화를 읽다 보면 우리 사회의 차별 혐오 배제의 갈등을 마주하게 된다. 눈부처 사상은 그저 막연히 타자를 안아 주는 것이 아니다. 관용과 화해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진실을 마주하고 잘못과 허물을 철저히 인식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슬기샘은 물고기 학교에서 따돌림과 놀림 그리고 물어뜯김이 나타나자 모두를 불러 모아 화해의 과정을 진행한다. 작가가 슬기샘을 통해 우리 사회에 전하는 갈등 치유의 방식이라고 본다.

“먼저 따돌림이나 놀림이나 물어뜯김을 당한 물고기들이 눈물을 흘리며 몸으로든 마음으로든 다치고 괴롭고 아팠던 기억을 모두 꺼내어 말했습니다. 다치게 한 물고기들도 속마음 깊이 뉘우치며 여러 차례에 걸쳐서 울면서 잘못을 빌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의 앙금이나 응어리를 말끔히 사라질 때까지 만나고 만나서 서로 이야기했습니다. 나중에는 한데 어울려 서로 안아 주며 또 울었습니다. 그치만 마지막에는 모두 환하게 웃었습니다.” (78)

 
이 이야기는 그가 오랫동안 연구한 원효의 화쟁사상을 동화형식으로 옮긴 것이다. 그는 화쟁사상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화쟁은 ‘서로 대립했을 때 대립물 사이의 조건과 인과, 특히 그 사이에서 작용하고 있는 힘과 고통에 대해 연기적 관계를 깨우치고 일심을 지향하여 파사현정을 한 후에 상대방의 조건과 맥락 속에 들어가서 중도의 자세로 소통을 하여 고통을 없애고 서로를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55)

 
그는 화쟁을 단순히 싸우지 말고 화합하는 것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것보다는 치열한 쟁(諍, 이것은 爭과 통한다)의 과정을 거쳐 화(和)를 지향해야 한다. 그러려면 모든 삿된 것을 혁파하고 무엇이 진실인가를 가려야 하고 권력을 대칭으로 만들어 관계자 모두가 철저히 민주적인 방식으로 토론해야 한다. 그러면서 서로를 부처로 바라보며 합의에 이를 수 있는 조건과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동화는 짧지만 이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전한다.

이 책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 내용의 이념성 혹은 사상성만이 아니다. 전편에 흐르는 작가의 우리 말 사랑이 특별하다. 역시 국문학자가 동화를 쓰면 뭔가 다르다. 그는 아리와 마루가 다녀온 길을 우리말로 작명했다. 보드라운내(강원도 삼척의 마읍천), 해오름바다(동해), 불뿜는땅(캄차카반도), 얼음둥둥바다(베링해), 무지큰난바다(태평양), 명태득시글바다(오호츠크해) 등등. 지명을 상징하는 요소를 감안해 적절하게 순 우리말로 바꾸어낸 노력과 창작열에 박수를 보낸다.

더욱 동화 전편에서 작가는 읽는 이들에게 눈부신 자연의 아름다움을 반짝이는 글솜씨로 선물한다. 하지만 이런 문장을 볼 때 나 같이 건조한 글을 쓰는 사람은 좌절감도 함께 느낀다.

“해님이 층층나무 그림자를 냇물 건너 골짝으로 밀어내자 못 가득 윤슬이 아름답게 반짝입니다. 산마루를 넘은 바람이 시샘하여 윤슬을 지워 버리자 우듬지들이 일렁이며 성을 냅니다. ” (26)

 
또 하나, 이 책 몇 면을 장식한 윤다은의 그림은 동화책의 여늣 삽화와 비교할 때 격을 달리한다. 그림 하나하나가 물속 세상을 그린 정식 회화 작품으로 인정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로 인해 이 동화책의 품격이 올라간 것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동화를 끝까지 읽다 보면 누구나 상상의 나래를 펼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원이다. 인간 세상은 공감과 협력으로, 우리가 사는 이 자연은 푸른 하늘과 오염되지 않은 땅과 바다로 만들어가야 한다. 다른 사람이나 생명을 위해 우리가 욕망을 절제하는 데서 더 행복감을 느끼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면 아직 길은 있다”고 믿는 작가의 소망이 바로 우리의 소망이다. (2023. 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