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장/정치

역사와 이념의 세습화와 그 한계

박찬운 교수 2023. 8. 27. 10:10
육군사관학교는 2018년 삼일절을 맞아 영내에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장군과 이회영 선생의 흉상을 세웠다. 지금 이 흉상을 철거하는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 KBS 뉴스.
 
 
(새벽에 일어나 최근에 일고 있는 일련의 현상에 주목했습니다. 도대체 이런 쓸데없는 일이 왜 일어나고 있는가. 이런 현상
의 본질은 무엇인가. 짧고 굵게 그 답을 구해 보았습니다.)
 
때아닌 역사논쟁과 이념논쟁이 한창입니다.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 건국일이다, 이승만 기념관을 만든다, 공산전체주의 세력이 민주·인권·진보로 위장하고 있다, 육사 교정의 독립투사 흉상을 철거한다, 백선엽의 친일 흔적을 지우고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숭모한다 등등. 대통령을 필두로 정부가 주도하는 이런 식의 역사논쟁과 이념논쟁은 보수정권이라고 한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과거의 역사논쟁 혹은 이념논쟁은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투쟁 성격이 강했습니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좌와 우로 갈려 투쟁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한국 전쟁 중 국군의 장교로 북한군과 중공군을 상대로 싸웠습니다. 저의 처가는 전쟁 중 좌익에 의해 멸문지화의 변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이분들이 전쟁 후 평생 반공을 앞세우는 우익진영에 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현재의 역사논쟁과 이념논쟁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기억투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역사와 이념의 한 가운데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윤대통령를 비롯해 이 정부의 장관들은 주로 70년대 후반,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소위 베이비 부머 세대들입니다. 독재시대의 경험은 있어도 지금 이야기하는 역사와 이념에 대해선 천박한 이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과거 박정희·전두환의 시절의 경험적 우익세력, 이명박·박근혜 시절의 반(半)경험적 우익세력을 능가하는 우경화의 길을 걷고 있으니 놀라울 뿐입니다.
 
이들이 이런 사고를 갖게 된 것은 스스로 학습하거나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엔 후자가 전자보다 훨씬 큰 영향을 줍니다. 경험과 실천 없이 책 몇 권 읽는 것만으론 강고한 역사의식이나 신념화된 이념을 만들기 어렵습니다. 비경험세대가 우경화로 의식화되는 것은 일종의 세뇌과정입니다. 어릴 때부터 밥상머리에서 부모로부터 지속적으로 교육받은 것들이 효심이란 기제를 통해 자기 신념화된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성장한 사람들이 경험적 우익세대의 빈공간을 대체하면서 이 땅의 새로운 우익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단언컨대, 비경험세대, 비기억세대가 주도하는 이런 우경화 논쟁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역사를 몸으로 경험하고 실천하지 못한 사람들에겐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이들의 역사인식은 거칠어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합니다. 진실성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절실함이 없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합니다. 더욱 살아 있는 기억세대에게조차 동의받기 어려운 초현실적 우경화의 생명력이 길 수는 없습니다. 잠시 현상을 바꾸는 것은 이들이 가진 권력이란 힘 때문이나 그것이 오래 갈 수는 없습니다.
 
밥상머리 교육에서 만들어진 역사와 이념의 세습화가, 이 땅의 살아 있는 역사, 도도히 흘러온 역사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잠시 찻잔 속의 태풍일 뿐입니다. 다만 경계를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이 현상의 추이에 계속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깨어 있는 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2023. 8.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