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장/정치

죽어가는 인권위, 이 정권 하에서 인권은 장식이 되었다

박찬운 교수 2024. 3. 30. 10:16

 

죽어가는 인권위, 이 정권 하에서 인권은 장식이 되었다

 

 

필자가 인권위 상임위원 시절 열린 전원위원회(2021. 9월)

 

나는 이 글을 전임 인권위 상임위원으로서 눈물을 뿌리며 쓴다.

어제(3월 25일) 인권위 전원위에서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 제출하는 인권위 독립보고서(인권위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 정기적으로 정부 보고서와 별도로 여성차별 상황에 관한 독립보고서를 제출함) 안건이 논의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차별금지법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고 한다. 사무처가 만든 보고서 초안은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않은 현 상황을 지적하면서 조속한 시일 내에 그 입법을 촉구하는 내용을 넣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위원 6인의 찬성을 받지 못해 그 부분이 채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차별금지법2006 인권위가 처음으로 정부에 제안한 것이고, 그 이후 대한민국 사회의 인권 문제 중 가장 중요한 이슈로 자리를 잡았다. 인권위는 지난 2020 또 한 번 차별금지법(평등법)의 제정을 국회에 강력히 권고하였다. 또한 유엔 인권기구도 인권위와 입장을 같이 해 지난 십수 년간 대한민국 정부에 차별금지법의 입법화를 여러 차례 촉구한 바 있다. 이렇게 차별금지법은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하고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인권위가 오랜 기간 대한민국 사회에 그 제정을 꾸준히 제안해 온 대표적 인권정책이다.

어제부로 인권위의 그러한 입장이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권위를 구성하는 11명의 인권위원 중 6명이 반대하거나 기권함으로써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들은 모두 이 정권 하에 임명된 위원들로서(대통령 지명 위원 2인, 국민의 힘 지명 위원 2인, 대법원 지명 위원 2인) 인권위가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온 차별금지법의 입법화를 외면했다.

현재 인권위원 다수는 현 정권 하에 임명되었고 그로 인해 인권위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것은 보수와 진보 논쟁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정권이 바뀌면 인권위의 분위기가 바뀌는 것은 숙명이지만, 인권위 설립 이래 23년 동안 요즘처럼 인권 가치에서 동떨어진 적은 없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하에서도 이렇지는 않았다.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인권위의 기본적 사명은 인권위원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가치이지만 지금 다수의 위원들에게 이러한 가치를 찾기 힘들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인권위 권고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인권위 권고를 받은 국가기관이 권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과거 같으면 권고를 수용하지 못하면 그 이유라도 성의 있게 설명했지만 요즘은 그렇지도 못한 모양이다. 인권위 권고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권고가 되어 가고 있다. 바야흐로 인권위가 고사 직전이다. 올 가을 인권위원장이 바뀌면 어쩌면 지금 상황이 그리워질 정도의 상황으로  더 악화될 것이 분명하다. 인권위는 올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시민사회로부터 사망선고를 당할 지경에 이르렀다.

도대체 인권위가 왜 이리 되었는가? 한 가지 이유다. 윤석열 정권의 출현이다. 이 정권은 도무지 인권이란 것에 관심이 없다. 인권위라는 기관이 대한민국 사회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모른다. 대통령은 인권위를 철저히 무시한다. 그의 안중에 인권위는 없다. 그러니 행정부의 누가 인권위 권고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현 정권 하에서 인권은 장식이 되고 말았다.

현 헌정 체제 하에서 인권위가 사는 방법은 딱 한 가지다. 현 정권이 인권 가치를 인정하는 새 정권으로 빨리 바뀌어야 한다. 진짜 3년은 너무 길다. 그러나 정권교체가 바로 안 된다면 적어도 국정기조라도 바꿀 모멘텀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대통령이 인권위의 존재를 인정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이번 총선은 그래서 중요하다. 인권이 더 이상 장식품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인권위를 살려내기 위해서, 야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 (2024. 3.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