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미국여행 막바지에 이르렀다. 귀국 날짜가 다가오고 있다. 솔트레이크에서 서울로 오는 직항편이 없어 귀국은 샌프란시스코에 하기로 하고 연초 여행계획을 짤 때 항공권을 예매해 두었다. 이 계획에 따라 귀국 전 미국 서부여행을 하기로 했다. 구체적인 계획은 솔트레이크에서 짰는데 생각할 것이 많았다. 원계획은 자동차 여행이었다. 솔트레이크에서 차를 렌트해서 아이다호와 오레곤을 거쳐 시애틀로 간 다음, 거기에서 I-5를 이용해 포틀랜드에 가고, 그 다음엔 서부해안으로 가서 1번 도로를 이용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것이다. 장장 2천 마일이 넘는 대장정이다.
이런 계획에 가족들 모두가 반대했다. 무리하다는 것. 무슨 환갑 넘은 노인네가 그런 무리한 일정을 짜느냐 하는 분위기다. 꼬리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여행에서 내 모토가 가족들 말을 잘 듣는 것 아닌가. 잔소리 줄이고 가급적 아내와 딸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는 게 가족의 평화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결심하고 또 결심하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계획은 축소되었다. 솔트레이크에서 항공편으로 시애틀로 간 다음, 거기서 차를 렌트해 시애틀을 잠시 보고 I-5를 이용해 샌프란시스코로 직진하되, 포틀랜드를 들르는 일정으로 조정했다. 사위는 학회 일정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이 말은 시애틀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약 900마일(약 1400킬로미터)의 운전 책임은 내가 진다는 의미. 시애틀 공항에서 차를 렌트할 때 나와 아내 그리고 딸 모두가 운전자로 등록을 하였지만 운전은 그래도 내가 하는 게 제일 좋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이럴 때 남자가 필요한 모양이다!). 콜로라도 여행에서 이미 1300마일을 운전했는데 샌프란시스코까지 못갈리가 없지 않은가.

시애틀
8월 7일 솔트레이크 발 델타 항공 비행기는 2시간의 비행 끝에 시애틀 공항에 도착했다. 27년 만의 시애틀 방문이다. 나는 1995년과 1996년 연이어 시애틀을 방문한 이후 오랜 기간 그곳에 가보지 못했다(1996년의 경우 샌프란시스코에서 1번 도로를 타고 바다를 보면서 북상해 시애틀에 도착했고, 돌아갈 때는 내륙 고속도로인 I-5를 이용했음).
1995년과 1996년은 내 인생에서 전기가 만들어지는 때인데 1995년은 미국유학을 결심한 해이고 1996년은 가족을 데리고 미국에 도착한 해이다. 이 당시 시애틀에는 민변 동료들이 여러 명 있었다. 지금과 달리 당시만 해도 변호사들에게 여유가 있었는지 한동안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사무실을 닫고 유학을 떠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아마도 그 효시는 박원순 변호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는 90년대 초 사무실 문을 닫고 영국과 미국에서 각 1년씩 연수를 한 바 있는데 민변 변호사들은 그의 뒤를 쫓아 1년씩 미국 유학을 떠나곤 했다. 조용환, 정미화, 김선수, 이덕우, 김갑배, 장주영, 임종인, 이기욱 변호사 등이 그즈음 미국 유학을 떠난 사람들인데 96년 시애틀을 방문해 보니 이덕우, 정미화 변호사가 있어 그들 집에서 며칠 유숙한 일이 있다.
공항에 도착해 렌탈카를 픽업하면서 공항을 둘러보니, 그 사이 한 번 정도 리노베이션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새 때국물이 여기저기 묻어 있다. 예전의 풍요로운 시애틀과는 거리가 멀었다.

차는 미국산 포드 엑스플로러. 생전 처음 운전해 보는 것이지만 크게 생소하진 않았다. 잠시 긴장을 하고 렌탈카 주차장을 빠져나오니 바로 다운타운으로 들어가는 고속도로. 서행을 하면서 차 상태를 점검한 후 5분 후 정상 속도로 가속해 다운타운에 입성했다. 저녁 무렵 시애틀의 상징 스페이스 니들이 석양에 번쩍인다. 마침 숙소가 그 인근이라 연신 사진 셔터를 눌렀다. 체크인을 하고 바로 나와 해변가를 산책했다. 많은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해변가 공원에 나와 산책을 하고 있다.
26-7년 전 나는 시애틀 곳곳을 돌아다닐 때 경이로운 눈으로 흥분해 있었는데 어쩐지 마음이 차분하다. 시간이란 많은 것을 변화시켰는데 인간의 감정을 바꿔 놓은 모양이다. 이 차분함의 정체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답은 한국의 발전이다. 30여 년 전만 해도 내가 미국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때 미국은 모든 면에서 우리보다 앞서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자연환경이야 미국을 따라갈 수 없지만, 인간이 만든 구조물은 이미 한국이 앞서가고 있기 때문이다. 호텔이 더 좋은 것이 아니고, 마켓이 더 좋은 것도 아니다. 미국의 많은 시설은 이미 쇠락에 쇠락을 거듭해 처음 미국 가는 사람들이라면 실망하기 쉽다. 내 차분함의 근원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시애틀은 무시할 수 없는 경제력을 자랑하는 미국의 일급도시임이 분명하다. 바로 이곳이 보잉,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스타박스, 노드스트롬가 시작된 곳이다. 세계 일류 기업이 이렇게 밀집해 있다는 것은 여기가 다른 곳과 뭔가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다운타운을 걷다 보면 내가 지난 몇 주 동안 보아 온 솔트레이크나 덴버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인구 자체도 광역권을 포함하면 4백만 명이나 되니 그들 도시와는 비교가 안되고 미국 북서부의 최대도시이자 첨단산업과 무역의 중심지로서의 아우라가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일정상 시애틀에선 긴 시간을 쓸 수가 없어 명소 한 곳만을 찾기로 했다.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이곳은 상설 파머스 마켓인데 1907년 오픈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 중의 하나이다. 시애틀을 오는 관광객이라면 반드시 한번은 와야 하는 명소 중의 명소. 차를 시장에서 조금 떨어진 도로변에 대고 마켓에 가보니 이미 사람들로 떠들썩하다.
찬찬히 꽃시장과 어시장을 둘러본 다음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커피 한 잔을 마셨다. 내가 발품을 팔아 스타박스 1호점에 가서 커피를 사오려고 했지만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 천지사방에서 이 1호점을 친견하고 거기서 커피 한잔을 마시겠다고 달려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그저 사진만 몇 장 찍을 수밖에. 재미 있는 것은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스타박스의 또 다른 점포가 있는데 거기는 손님 몇 명이 없을 정도로 한산한 모습.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선 장기간의 걸친 명성과 그에 따른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현장이다.





포틀랜드
포틀랜드는 시애틀에서 27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I-5 고속도로를 통해 열심히 밟으면 4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역시 대도시에 산업의 중심지라 고속도로도 차량으로 넘친다. 특히 대형 트럭이 얼마나 많은지 추월할 때마다 그 위세에 짓눌려 간이 쫄깃해진다.
포틀랜드에 가기 전에 이런저런 소문을 들었다. 그곳은 요즘 두 가지가 유명한데, 하나는 커피 또 하나는 노숙자라는 것이다. 커피가 유명하다는 것은 카페의 나라 한국에서 온 여행자로선 환영할 일이지만 후자는 난감한 일이었다. 미국 경제가 나쁘다 보니 집 잃고 거리를 헤매는 사람들이 날로 많아지고 있다. 미국의 미래에 짙은 그림자가 깔리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영원히 1등 국가의 지위를 유지하긴 어렵다. 이미 정상에서 하산 중이라는 것은 여기저기에서 감지되고 있다. 솔트레이크에서는 큰 문제를 느끼지 못했지만 날씨 좋은 미국 서부 도시는 노숙자의 증가, 위험한 치안 등의 문제로 안심하고 여행하기가 어렵다.
솔트레이크 인근의 파크시티에서 우연히 만난 어느 한국인은 내게 서부 도시(특히 샌프란시스코 지역)가 예전에 비해 너무 위험하다고 겁을 단단히 주었다. 절대로 차 속에 물건을 남겨두고 말고 불편하더라도 귀중품은 배낭에 넣어서 어디든 가지고 다니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시애틀에서의 주차는 호텔 주차이고 워낙 경비가 잘된 곳이라 염려가 없었지만 포틀랜드는 에어비엔비 숙박이라 노상주차를 하는 수밖에 없다. 집근처에 주차를 하고 숙소로 들어갈 때 영 미덥지가 않았다. 내일 아침 아무 일 없이 이 차를 만날 수 있을까? 하지만 운이 좋았는지 여행 중 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는 숙소(에어비엔비)가 치안이 좋지 않은 곳이라고 하는데도 마침 숙소에 차고가 따로 있어서 밤엔 아예 셔터를 내려 놓으니 안심이 되었다.

말이 나온 김에 미국이 처한 어려움을 덧붙이면 살인적인 고물가 시대라 사람들의 삶이 너무 여유가 없다는 점이다. 미국 고물가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자동차 기름값이다. 미국은 세계 제1의 소비 국가이고 에너지를 거의 무한대로 사용해온 나라이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 완전 제동이 걸렸다.
세계적으로 보면 잘 된 일이라고 생각되는데 미국인들 입장에선 너무 급격하게 가격이 올라가기 때문에 감당하기가 곤란할 지경이다. 내가 미국에 있던 시절 미국의 기름값은 한국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이번에 미국 이곳저곳을 다니며 확인해 보니 지역마다 차이는 있지만 많은 곳이 한국을 능가한 수준이 되었다. 유타주와 콜로라도는 1갤론(3.8리터)에 4불(5,200원 수준)이니 한국보다 약간 낮은 상황이었고, 캘리포니아의 경우는 1갤론에 5불 50센트(7,200원) 전후이니 한국보다 높은 수준이다. 소득이 오르지 않은 미국인들 입장에선 사는 것이 보통 고통스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해고라도 되면 사실 그날로 집을 비워줘야 하는 사람들이 수천 만명에 달한다. 게을러서 거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 경제구조가 노숙자를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포틀랜드는 오레곤의 최대도시로서 미서부 북부지역에서 시애틀 다음으로 큰 도시이다. 시와 인근지역을 합치면 250만 명 정도의 사람이 사는 곳이니 미국 도시로서는 제법 밀집도가 높은 곳이라 할 수 있다. 이곳도 과거 시애틀과 함께 캘리포니아(1840년대 후반)와 알래스카(1890년대)에 금광이 발견되어 골드러시가 이루어질 때 미전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커진 곳인데, 이곳에서 그저 커피나 한잔 하고 다음 행선지로 부지런히 달려야 할까?
그러나 썩어도 준치라고 포틀랜드 도심은 문화의 향기가 그득했다. 그중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파웰 서점(Powell’s City of Books). 펄 디스트릭트 전체가 이 한 개의 서점인데 바로 이곳이 세계에서 가장 큰 독립 서점. 1971년 서점이 오픈했으니 올해가 52주년이 된다. 종업원 500명이 이 서점에서 일하는데 연간 4,500만불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전 세계의 대형서점이 망해 가고 있는 상황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나는 이 서점에 들어가서 이곳저곳 섹션을 훑어보면서 서점의 규모와 장서의 다양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서점 종업원이 내게 무엇을 찾느냐고 묻기에 즉석에서 종업원에게 몇 가지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인터넷 시대에서 이 서점이 성공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첫 번째가 명성이라고 했다. 전국적 명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포틀랜드를 찾는 여행자들은 누구나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 중 한 명 아닌가! 그리고 또 하나는 운영방법이 매우 자유스럽다는 것. 여행자들이 이곳에 들어와 무제한 책을 읽을 수 있으니 여행자들이 부담없이 들어와 놀다가 미안한 마음에 책 한 권을 사가지고 가는 것이다. 나도 법률 코너에 가서 책을 고르다가 얼마 전 타계한 긴스버그 대법관 자서전을 기념으로 샀다.



포틀랜드 도심을 둘러보면서 슬로건 하나가 눈에 띄었다. Keep Portland Weird. 포틀랜드를 문화적으로 특별하게 만들자는 것이다. 이 지역이 미국 내에서 비교적 리버럴한 곳이라 이런 운동이 가능한 것 같다. 이 운동은 원래 텍사스 오스틴에서 시작되었다는데, 2000년대 초 포틀랜드에 상륙해, 포틀랜드를 미국 도시 중 가장 미친 도시, 가장 문신을 많이 한 도시 등으로 만들었다. 뭔가 주류에서 일탈해 자유를 추구하자는 운동인데, 이런 일탈이 하나의 산업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참신하다. 포틀랜드는 이것을 구호로 각종 문화행사를 정기적으로 열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갈 길 먼 여행자로선 포틀랜드에서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단지 포틀랜드 전경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떠나기 전 피토크 맨션이란 곳으로 차를 몰았다. 포틀랜드 서쪽 언덕에 자리잡은 프랑스 르네상스 스타일의 저택은 20세기 초 포틀랜드의 갑부인 헨리 피토크와 그의 부인이 거주한 곳으로 저택 자체보다는 이곳이 포틀랜드 전역을 전망할 수 있는 뷰포인트로 유명하다. 저택의 정원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파노라마 뷰의 포틀랜드를 관망할 수 있다.


마운트 샤스타
포틀랜드를 출발해 I-5에 들어선 후 열심히 가속 페달을 밟으니 저녁 무렵 마운트 샤스타(4321미터)가 눈에 들어온다. 도로상에 보이는 샤스타산의 위용은 압도적이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만년설을 이고 있는 산 정상이 석양에 반사되어 그 모습을 점점 확대시키고 있었다. 샤스타 산은 미국 북서부를 아우르는 케스케이드 산맥에서 가장 높은 고봉 중의 하나다. 첫째는 시애틀 인근의 레이니에산(4392미터)이고 그 다음이 이 산으로 불과 70미터 차이다.
딸은 조수석에서 연신 산의 위용을 카메라에 담아보고자 했지만 한계가 역력했다. 하룻밤을 이곳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본격적으로 이 산을 카메라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 정보를 찾아보니 이곳에서 이 산과 호수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차를 몰아 시스키유 레이크로 향했다. 아침인지라 사람은 우리 외에 여행자들은 없었다. 국립공원이라 입장료를 내고 호숫가에 차를 주차시키고 호수로 나아갔다. 순간 호수와 샤스타 산이 동시에 얼굴을 내밀었다. 연중 가장 더운 8월의 더위 속에 만년설이 보이는 4천미터의 고봉과 맑디 맑은 호수의 조화가 별천지를 만들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버클리
저녁 무렵 차는 샌프란시스코 배이 지역의 다리를 통과해 숙소인 리치몬드에 도착했다. 오랜만이다. 26년만의 방문이다. 나는 이 지역에서 1996년-1997년 사이 만 1년을 산 적이 있다. 버클리 대학 인근의 알바니라는 곳에 집이 있었는데, 숙소를 얻은 리치몬드와는 불과 10분 거리다. 당시 나는 가끔 가족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배이 지역을 한 바퀴 도는 드라이브를 하곤 했었는데, 코스는 이런 것이었다. 알바니-버클리-배이 브릿지-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금문교-소살리토-티뷰론-리치몬드 브릿지-리치몬드-엘서리토-알바니.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이곳에 오니 감회가 새롭다.




짐을 푼 다음 바로 우리 가족이 살았던 집부터 찾았다.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네비가 필요 없었다. 어제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26-7년 전의 기억은 또렷하니 어찌된 일인가. 단번에 살던 집(산파블로 애비뉴와 솔라노 애비뉴 근처)을 찾아가 그 앞에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주변은 그 때를 생각하니 많이 복잡해졌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새로운 가게가 많아졌으나 특별히 변한 것이 없었다. 큰 아이가 다니던 학교도 그대로고, 거의 매일같이 다니던 수퍼마켓(세이프 웨이)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반가운 것은 우리 가족이 가끔 외식을 하던 중국음식점도 그대로라는 사실.


다음 날 오전 버클리에 가서 UC 버클리를 들렀다. 정문부터 천천히 걸어 중앙도서관을 거쳐 버클리대의 상징 새더 타워(Sathe Tower)까지 걸으면서 어떻게 해서 이 대학이 세계적 명문대학의 반열에 올랐는지 생각했다. 버클리대는 University of California 시발점이 된 대학으로 세계 최고의 연구중심 공립대학이다. 1868년 문을 연 이후 수많은 인재를 키워냈다. 요즘 영화로 나온 원자탄 개발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도 이 대학 물리학 교수였다.
버클리대의 연구력이 얼마나 우수한지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벨상을 받은 대학 중 하나라는 데서도 쉽게 알 수 있다. 노벨상을 받은 교수의 수가 이제까지 110명! 최근 화학 분야에서는 3년 연속 노벨상을 받기도 했다. 사위의 전공이 생명공학이라 관련 학부인 화학대학(College of Chemistry)에 다녀 왔는데, 재미 있는 말을 전한다. 버클리 대학에서 노벨상을 받았다고 해서 학교에서 해주는 대우는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다. 대학 건물에 수상자의 사진과 업적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는 명판과 그들을 위한 주차 공간을 제공하는 게 전부라는 것. 매년 노벨상 한 두 개는 자신들의 것이니 그 이상의 대우를 해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시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베이 브릿지를 통과해야 하는데 과거와 달리 유료로 바뀌었다. 차량의 과도한 시내 진입을 막기 위한 것인데 별 효과는 없어 보였다. 두 번을 세 번을 통과해 보았는데 러시아워에는 단 1-2킬로미터를 가는데 가는데 30분 이상이 걸렸다. 샌프란시스코는 시드니와 나폴리와 더불어 세계 3대 미항 중 하나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세 곳을 다 가본 사람으로서 말하건대, 최고는 샌프란시스코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샌프란시스코만과 날씨다.
샌프란시스코만은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크게 보면 8자 모양의 만이다. 위쪽 베이 쪽으로 티뷰론이나 리치몬드가 있고 아래 베이 쪽으로 스탠포드 대학이 있는 팔로알토나 산호세가 있으며, 버클리가 마주한다. 각각의 도시는 행정구역으론 다른 도시이지만 샌프란시스코 베이 전 지역은 860만명의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미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광역도시권이다. 따라서 샌프란시스코에 간다는 것은 이들 모든 지역을 한번에 둘러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 날씨가 기가 막히다. 미국 서부가 여름이 되면 무척 더운데 이 지역만 유난히 선선하다. 에어컨이 필요 없을 정도다. 반면 겨울은 영하권으로 떨어지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그런 연유로 미국에서 노숙자가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이기도 하다. 여하튼 샌프란시스코는 좋은 날씨에 좋은 풍광을 경험할 수 있는 미국 최고의 관광지다.

샌프란시스코에는 수많은 관광 포인트가 있어 하루 이틀에 그들 모든 곳을 가보긴 어렵다. 제대로 샌프란시스코를 만끽하기 위해선 며칠 도심에 머물면서 천천히 걷든지 택시를 타든지 하면서 돌아보아야 한다. 금문교, 케이블카, 알카트라즈 감옥, 차이나타운, 피셔맨 워프 등이 랜드마크로 불린다.
이런 곳들은 옛날 이곳에 살 때 모두 몇 번씩 가본 곳이라 다 돌아볼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피어 39 근처에 차를 대고 그 일대를 돌면서 옛날을 추억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숙소로 돌아올 때는 차를 몰아 금문교를 넘어 소살리토와 티뷰론을 들른 다음 리치몬드 브릿지를 건넜다.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나파 밸리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마지막 날은 나파 밸리를 가는 것으로 했다. 이것도 추억여행인데 내가 이곳에 살 때 가끔 주말을 이용해 가족들과 가보았던 곳이다. 미국에서 가장 질좋은 와인이 생산되는 곳이 나파 벨리다. 숙소인 리치몬드에서 한 시간 이내에 닿을 수 있는 곳으로 풍광이 좋은 곳이다.
이곳 벨리가 지중해성 날씨라 100년 전부터 유럽 이민자들에 의해 와이너리로 개발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30여 년 전만 해도 이곳은 그저 알만한 사람들이 주말에 간단히 피크닉 차원에서 들러 와인 테스팅하고 입에 맞는 와인 몇 병을 사오는 곳이었는데, 이번에 가보니 나파는 완전히 관광도시가 되어 있었다. 나파 다운타운의 몰은 고급 브랜드 가게로 꽉 차 있고, 와이너리는 대부분은 가이드 투어와 테스팅을 유료(1인당 100불 안팎)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운영하고 있었다. 과거의 한적함이 사라져 나로서는 아쉬움이 컸다.
하지만 한 곳(사투이)은 여전히 무료 테스팅과 피크닉을 고집하고 있었는데, 그런 이유인지 주차장은 수백 대의 차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고, 와이너리 샵엔 수백명의 관광객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도 나파 벨리 드라이브를 하면서 산 정상에 있는 조그만 와이너리 하나를 찾아 가족 경영의 와이너리의 진수를 살짝 맛본 것은 그나마 행운이었다.
이 여행기를 마무리함으로써 2023년 여름 미국 여행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2023.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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