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고독과 슬픔 28

지는 해를 바라보며 꿈을

해가 저무는 서쪽 맨 끝에 앉아 생각에 잠긴다벽두의 막막한 고통은 내 심장을 갉아먹고한 번 어둠이 깔리면 영원히 아침은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나시련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일어서기 힘들다 해도동토의 계절이 길어 기다려도 또 기다려도 봄은 오지 않을 것이라 하였지만언젠가 언 땅에서 움이 트듯 나에게도 봄은 오고야 말 것이야 손에 손잡고 내일로 뛰어 가자 우리 앞에 놓인 저 높은 장벽을 뛰어 넘어 거칠 것 없는 광야로 몸을 던지자마음속에 간직한 고운 정 되새기며 사랑의 실타래 한 올 한 올 뽑아오지 않을 미래 올 수 없는 희망그것들 꽁꽁 묶어 우리 것으로 만들어 보자

연결의 행복, 연결의 불행

연결의 행복, 연결의 불행 오늘이 추석이라고 하지만 사실 저에겐 느낌이 없습니다. 명절을 같이 보낼 가족 친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명절이란 사회적 제도라 그 사회와 떨어져 혼자 사는 사람에겐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린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저는 대한민국 사람이란 것을 잊지 않고 이 순간 추석을 이야기합니다. 친구들이여, 즐거운 한가위 되십시오! 연결! 이 문명의 시대는 우리 모두를 실시간으로 연결시킵니다. 물리적 거리란 의미가 없습니다. 지구 반대편에 있을지라도 저와 당신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연결의 물리적 계기는 전기와 전파입니다. 이 두 가지가 없다면, 이 두 가지를 다룰 수 있는 기술을 인류가 개발하지 못했다면, 나와 당신의 연결은 그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하겠지..

나의 정체성에 대하여

나의 정체성에 대하여 이런 글을 올릴 줄이야! 마치 자아비판을 하는듯하고, 종북논쟁에서 자기변호를 하는듯하여 영 마음이 좋지 않다. 그럼에도 한번은 치러야 할 통과의례라면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해 이 글을 쓴다. 내 페친 수가 4천 명이 넘었다. 증가속도로 보아 올 여름을 넘기면 한계수치에 접근할 것이다. 그것 때문인지 요즘 친구요청에 부쩍 보수적인 대응을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보니 5명이 친구요청을 해 왔는데, 전원 거절했다. 플필 사진이 없는 요청은 우선 거절했고, 사진이 있더라도 감이 이상한 경우도 모두 거절했다. 한 사람은 긴가민가해 우선 수락했다가 타임라인을 확인하니 역시 이상해서 즉시 페절하고 말았다. 내가 과거와 달리 페친요청에 보수적인 대응을 하는 게 오로지 페친 수 ..

고 김창국 변호사님을 추모하며

고 김창국 변호사님을 추모하며비판하고, 저항하고, 자유를 그리며 살다 박찬운(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변호사) 고 김창국 변호사님 캠퍼스에 하얀 벚꽃이 만발했습니다. 계절의 여왕을 완상하던 중 바람이 한 차례 부니 꽃잎이 눈송이처럼 떨어집니다. 그때 한통의 문자. ‘김창국 변호사 별세’. 그 분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백발이 성성하고 날카로운 눈매의 깡마른 노신사. 제가 26년 전 새내기 변호사로 그 분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습니다. 50초로의 중년에게서 느껴지는 일반적인 인상이 아니었습니다. 강력한 포스가 넘쳤고, 자신감이 충만한 분이었습니다. 법조인들 사이에서 고인은 젊은 시절 수재로 통했습니다. 약관 21세에 고시에 합격해 검사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일면에 불과합니다. 만일..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 여느 때 같으면 잠자리에 들 시간이지만 웬지 잠이 오질 않는다. 우연히 유투브에 들어가 음악 파일을 찾다가 한 곡을 만났다. 순간적으로 스쳐가는 아련한 기억... 나를 잘 아는 후배 변호사가 있다. 지난 30년 이상 교유한 친구다. 그 후배가 내게 하는 말이 있다. “형은 딱 한 가지만 갖추면 완벽한데...” 딱 한 가지? 그게 음악이란다. 나는 음악을 모른다. 나름대로 교양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의 핵심인 음악을 모르니 내 교양은 사실 반신불수다. 이렇게 된 데에는 어린 시절의 영향이 크다. 나는 한참 감수성이 예민할 때 음악을 듣지 못하고 자랐다. 슬픈 과거지만 형편이 그랬다. 성인이 되어 여러 가지를 배우길 좋아했지만 음악만큼은 내 것이 되지 못했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생각..

두 가지 슬프고도 감사할 일

두 가지 슬프고도 감사할 일 나는 하루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낸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저녁까지. 그렇다보니 보통 점심, 저녁 두 끼를 학교에서 해결하는 일이 많다. 그런 내게, 최근, 아주 슬픈 일이 발생했다. 아마 나만이 아니고 우리 학교에 다니는 많은 학생과 교직원들도 내 마음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슬픈 일은 모두 내가 자주 다니는 식당에서 일어났다. 하나는 학교 뒤에 있는 동네 밥집이다. 이 밥집은 2년 전 개업을 한 테이블 대여섯 개의 조그만 식당이다. 이곳에서 내가 자주 먹는 음식은 된장찌개 백반. 이 집 된장찌개는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의 손맛을 느낄 수 있어 하루에 두 끼를 먹을 정도였다. 주인 아주머니 올케가 충청도 태안에서 보내오는 된장으로 끓인다는 이 찌개를 먹다보면, 솔직..

무덤 앞에서

작년 이맘 때 나는 스웨덴 룬드라는 작은 도시를 배회하였다. 이국 땅에서 혼자 지내는 것은 생각보단 쉽지 않았다. 나의 일과 중 즐거움은 도시 산책---그것은 지금도 그렇지만---.산책 길에서 꼭 들렀던 곳은 공원 묘지였다. 200여 년이 넘은 공원묘지는 내게 안식을 주었다. 나는 그곳 벤치에 앉아 책도 읽고 일기도 썼다. 그리운 사람 하나하나를 기억해 내기도 했다. 묘소마다 사연이 있을 것이다. 나는 거기에 쓰여진 조그만 비석 하나하나를 보면서 그 사연을 알아보고자 했다. 그 중에는 이런 묘소도 있었다. 아주 작은 비문이 있고, 꽃이 놓여져 있고, 그리고 벤치 하나가 놓여져 있는 것이다. 저 벤치는 무엇일까?생각할 것도 없이 그것은 가족이 묘소를 둘러보면서 죽은 이를 회상할 때 잠시 앉는 곳이리라. 나..

아름답고 따뜻하고 용감한 벗, 내툰나잉, 우리 곁을 떠나다

아름답고 따뜻하고 용감한 벗, 내툰나잉, 우리 곁을 떠나다 오늘 저녁 부천 석왕사에서는 한 외국인의 추모행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 내툰나잉. 난민이자 버마의 민주투사입니다. 그는 아웅산 수지 여사가 이끄는 NLD 한국 지부를 이끌었습니다. 2000년대 초 그는 NLD 친구들과 함께 난민신청을 했습니다. 당시 한국엔 난민으로 인정받은 외국인이 10명도 채 안 되었을 때입니다. 저는 당시 민변에서 난민지원활동을 하면서 그와 그의 친구들을 도왔습니다. 이들은 민변의 지원 아래 난민으로 인정받음으로써 불법체류자의 지위를 벗어났습니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지난 십 수년간 한국에서 조국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아시아 각국의 민주운동가들과 연대하며, 싸웠습니다. 이제 버마가 민주화되어 가면서 곧 귀국을 앞두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