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사건은 이제 국정원 댓글을 넘어 국군 사이버사령부의 정치글로 번져가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국가기관의 불법선거개입은 이제 혐의를 넘어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어제 대통령이 오랜 침묵을 깼다. “국가기관 선거개입 의혹 정확히 밝히고 책임 묻겠다”고. 그런데 무게중심은 그 말보다 “진행 중인 사법부의 판단과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말인즉, 국정원의 선거개입이 재판결과로 밝혀지면 그때 가서 응분의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이다. 혹시 이 말이 재판결과에 따라서는 국정원 댓글 사건을 그저 야권의 정치공세로 마감하겠다는 뜻은 아닐까? 여하튼 이런 논리의 법적 근거는 무죄추정이라는 헌법원칙이다. 확정판결이 나오기 전에는 어떤 혐의도 범죄로 예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우리 국민은 국정원 사건을 더 이상 따지지 말고 그냥 두고 볼 일이다. 모든 진실규명은 법원이 알아서 해줄 테니 말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 법원의 재판으로는 이 사건의 범죄사실 전모를 밝혀낼 수 없다. 그 진상은 역사의 재판에 맡겨야 하고, 여기엔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될 여지가 없다. 국정원 댓글 사건에서 우리가 규명해야 할 사실은 특정인의 형사책임과 관련된 범죄사실보다는 국정원의 불법선거개입이라는 범죄사실의 전모이다. 형사재판이란 엄격한 증거로 범죄사실을 증명하여 개인에게 형벌을 가하는 과정이기에 검사는 실제 발생한 범죄사실 전부가 아닌 공소유지가 가능한 몇 가지 사실만을 기소한다. 그러기에 국정원 관계자 몇 명이 유죄로 확정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국정원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고 할 수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는 형사재판의 속성상 공소사실이 인정되지 않을 수도 있다. 법원의 재판만으로는 진상규명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런 사건은 사법절차뿐만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배심원이 되어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이게 바로 국회가 중심이 되는 역사재판이라는 것이다. 역사재판에선 그 증명도 사법절차에서 필요한 엄격한 증명이 필요 없다. 진상규명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증거도 자유롭게 사용돼야 한다.
사법부의 사실인정과 관계없이 역사재판을 통해 진상이 밝혀진 예는 수없이 많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한 예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은 1990년대 중반 전두환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에 대한 재판을 통해 인정된 것이 아니다. 그 진상은 국회의 5공 청산 청문회 활동, 언론사의 취재활동, 수많은 피해자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국민이 인정했고, 국회가 법률로 인정한 것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일어난 민간인 학살사건도 마찬가지다. 보도연맹 사건, 거창양민학살 사건, 노근리 사건 등이 언제 사법부의 사실인정에 의해서 밝혀졌는가. 물론 일부 사건은 사법심사의 대상이었지만 그것으로 밝혀진 것은 역사적 범죄행위 중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이들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은 결국 정치권을 비롯하여 국민 모두의 몫이었다.
국정원 댓글 사건의 진상규명을 사법부가 판단할 때까지 기다리자는 논리는 헌정파괴를 그냥 두고 보자는 이야기나 다를 바 없다. 개인에 대한 형사책임 유무는 당연히 법원판단을 기다려야 하지만 이 사건의 실체를 확인하는 작업은 그럴 필요가 없다. 그 실체는 재판 결과와 관계없이 수사과정에서 나타난 사실, 국회의 조사활동, 언론의 취재, 시민단체 및 민주시민의 활동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결코 사법부의 판단만을 마냥 기다릴 일이 아니다.
(경향신문, 2013. 1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