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st Essays/깊은 생각, 단순한 삶

내 삶에 감사

박찬운 교수 2023. 5. 17. 04:53

 

내 생활의 대부분이 여기에서 이루어진다. 이 방에서 강의 준비를 하고 논문을 쓰고 책을 집필한다.

 
살다 보면 슬픈 일이 많이 일어나지만 그래도 감사할 일이 더 많다. 살다 보면 우울한 일도 많지만 잘 생각해 보면 기쁜 일이 더 많다. 지금 시간 새벽 3시 반, 책상 앞에 앉으니 사위는 고요하다. 모두가 새벽의 단잠 속에 빠져들어 간 이 시간에 조용히 내 삶의 감사함을 열거해 본다.

내 주변의 무탈함에 감사하다. 우리 집 아이들도 이제는 커서 내 곁을 떠났다. 둘 다 자신들의 세계 속에서 잘 살아가니 크게 걱정할 일은 없다. 형제들의 삶은 아직도 부족한 것이야 많지만 과거보단 좋아졌다. 이제는 조카들도 커서 밥벌이를 하고 대부분 짝을 만나 결혼을 했으니 걱정거리가 줄었다. 4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자식들의 걱정거리를 많이 가지고 가신 것 같다. 그전까지만 해도 전화기 벨이 울리면 가슴이 철렁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아버지 감사합니다.’

내 건강함에 감사하다. 나는 어린 시절 병약했다. 젊어서도 강건치 못했다. 그런 내가 나이를 먹어가며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 많이 걷고 목욕을 자주하고 음식을 절제한 탓이다. 얼마 전까지 체중을 재면 저울 눈금이 과체중 구간을 가리켰지만 이제 정상 구간에 고정되었다. 20여 년만의 큰 변화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바지가 헐렁해졌다. 며칠 전 청바지에 선글래스를 끼고 나갔더니 모두가 놀라는 눈치다.

아직도 일할 수 있는 힘에 감사한다. 3년간 공직에 있다가 학교로 복직하니 마치 새로운 환경에 온것처럼 어색했다. 제대로 교수직을 해낼 수 있을까 내심 걱정했지만 다행이도 금방 적응했다. 오랜만의 강의도 할 만하다. 특히 학생들의 호응이 좋으니 보람이 있다. 학부 강의에선 수업 시간이 끝날 때마다 학생들이 감사하다는 표시로 박수를 친다. 종강 시간도 아닌데 매일 종강을 하는 기분이다.

내 글쓰기는 지난 10년 이래 가장 큰 성과를 내고 있다. 절간 같은 연구실에서 강의 준비가 끝나면 바로 논문과 책 집필 작업을 하는데, 그 성과가 하나하나 나타나고 있다. 지난 세 달 동안 한 일을 생각해 보니, 논문 하나를 완성해 저널에 보냈고, 인권위 회고록 집필을 끝냈다. 거기다가 교양서인 ‘자유란 무엇인가’ 개정 작업도 지난 주 끝내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다. 그뿐이 아니다. 내가 그동안 쓴 글을 모아 새로운 수필집을 기획 중인데 관심 갖는 출판사가 나타나 곧 출판계약을 할 단계에 이르렀다. 이 정도 성과면 40대, 50대 초반 내 연구력이 가장 왕성할 때와 비교해 크게 뒤지지 않는다. 감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조용하게 루틴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다. 나는 번잡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찍 일어나 새벽과 마주하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일과 중엔 연구실에서 고요하게 일을 하고 때때로 밖에 나가 햇빛을 받으며 산책을 한다. 주말이 되면 강남 일대를 혼자 걸으며 단골 카페에 가서 커피 한잔을 마신다. 이 루틴하고 평온한 삶이 내겐 큰 행복이다. 세상에 이런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늘이 준 복이라 생각한다.

새벽에 일어나 이런 감사함을 생각하는 것은 어제의 우울함에 반성일지 모른다. 어젠 종일 우울함에 시달렸다. 나이탓인지 내게도 이런 일이 가끔 찾아온다. 강한 햇빛을 받으며 땀을 내 걸어도 그것이 가시지 않았다. 일시적이지만 고독감이 밀려왔다. 이제 잠을 자고 깨끗해진 머리로 감사함을 생각하니 정리된 느낌이다. 오늘 하루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신이여! 내 삶에 감사합니다. Gracias a La Vida!

(2023.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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