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st Essays/깊은 생각, 단순한 삶

심심한 삶

박찬운 교수 2023. 4. 24. 17:22

연구실, 2006년 이후 오늘까지 이 방을 떠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 삶은 심심하다. 음식은 짭조름한 것을 좋아하는데 삶은 싱겁기 그지 없다. 심심하다는 것은 단조롭다는 것이다. 오늘 하루가 어제 같고 어제가 오늘 같은 삶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루틴한 삶에 만족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내겐 이보다 좋은 삶은 없다.

나는 일찍 일어난다. 작년까지만 해도 4시 무렵 기상했는데 어쩐 일인지 최근 들어선 3시쯤 깬다. 조금 더 자야겠다는 생각에 눈을 감아보지만 이미 잠은 저 멀리 도망갔다.

책상 앞에 앉아 메일을 확인하고 글을 쓰거나 독서를 한다. 지난 2월 공직 퇴임 후 이 시간을 이용해 회고록을 썼다. 학교에 돌아 왔으니 학술 논문을 쓰는 것이 본업이라 생각하고 요 며칠은 거기에 온 정신을 쏟아부었다. 

6시가 되면 부엌에 나가 빵을 굽고 과일을 깎아 팬에 넣고 볶는다. 이런 아침상을 준비한게 어느새 10년이 넘는다. 식사를 한 다음 화장실에 가서 세면을 하고 장을 깨끗이 비운다. 나에겐 이 시간이 하루 중 매우 중요하다. 출근하면서 장이 시원하지 않으면 종일 불쾌감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화장실에서 오래 머문다. 내 지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고 화장실 독서를 하는데, 지난 몇 년은 독서 대신 영화를 봤다. 이렇게 해서 지난 3-4년 간  본 영화가 족히 500편은 넘으리라. 이 글을 보는 분들에게 당부하노니 이 습관만은 닮아선 안된다!

8시가 되면 집을 나와 학교로 향한다. 출퇴근은 항시 지하철을 이용하고 가급적 많이 걷기 위해 일부러 정거장도 한 정거장을 더 가서 내린다. 언덕배기 학교라 사람들은 싫어하지만 매일 이렇게 걸으니 다리 하나는 단단하다.  연구실에 도착하면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다. 이 때 차 한잔을 마시면 잔잔한 행복감이 밀려온다.

이제 오전 일과가 시작된다. 두 시간 정도 수업준비나 논문쓰기를 한다. 11시가 넘으면 이른 점심-아침을 6시에 먹으니 11시만 되면 배가 고프다-을 먹기 위해 연구실을 나가 학교 뒤 사근동으로 간다. 여기가 내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1973년 이곳에 왔으니 올해가 50주년이다. 내 삶의 역사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를 것이다. 왜 내가 이곳을 그리도 좋아하는지 누가 알랴. 요즘 내가 자주 점심을 먹는 집은 내가 고교 시절 살던 집, 바로 옆집이다. 나는 밥을 먹으면서 어린 시절의 이런저런 일을 떠올린다.
 

이곳이 사근동이다. 올해로 내가 이곳과 인연을 맺은지 50년이 된다. 나는 매일 고향을 찾아간다.

 
나는 점심을 먹고 나면 꼭 카페라테 한 잔을 마신다. 내가 사근동에서 잘 가던 카페가 하나 있었는데 아쉽게도 이 카페 주인이 코로나 시기 이곳을 떠난 모양이다. 오랜만에 찾으니 카페는 이름을 바꾸었고  내가 마시던 그 라테는 더 이상 세상에 없다. 애석한지고!

마침 잘 가던 음식점 사장님 내외가 업종을 바꾸어 카페를 시작했는데 내 입맛에 맞는 라테를 만들어 주었다. 그 뒤로 라테는 이 집에서만 마신다. 아마 정년 전까지 1년에 적어도 200잔은 마실거라 본다. 

나는 점심을 먹고 카페라테를 마신 다음 연구실로 돌아오는 길에 운동장으로 향한다(과거에는 학교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내가 없는 사이 대운동장이 잘 정비되었다. 넓은 운동장 트랙을 산책 삼아 걷는다. 한 바퀴 돌면 700미터, 서너 바퀴를 돌고 연구실로 돌아간다.

일주일에 3번 수업이 있는 시간을 제외하곤 오후 일과는 오전과 같이 연구실을 벗어나지 않는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잠시 졸리면 밖에 나가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산책한다. 이렇게 하다 보면 퇴근시간이 다가온다.

귀가길, 나는 한양대 역을 이용하지 않고 서울숲 역까지 걸어간다. 걸어가면서 성동교를 건너며 살곶이 다리를 바라본다.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의 이야기가 전해 오는 서울의 역사 유적이다. 이성계가 함흥에서 돌아오면서 이방원을 향해 화살을 쏘았으나 맞지 않고 옆 기둥에 곶혔다고 해 나온 말이 '살곶이'라고 한다. 나는 저 다리를 50년 동안 보아 온 증인이다.
 

저기 보이는 다리가 살곶이 다리다. 왼쪽 돌다리 부분이 원래의 살곶이 다리다.

 
집에 도착하면 바로 저녁을 먹고 피트니스에 가서 운동을 한다. 이미 만 보를 걸었지만 한 30분 빠른 걸음으로 더 걷고 목욕을 한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잠시 독서를 한 뒤 취침에 들어간다. 이것이 나의 일과다.

아주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아닌 한 저녁 약속은 피한다. 주말이 되면 점심 무렵 집을 나와 강남 이곳저곳을 걷는다. 이렇게 10년 이상 걷다보니 나는 강남 골목을 거의 다 다녀보았다. 이것이 나의 한 주 삶이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도닦는 사람으로 여길지 모른다. 어쩜 그리 재미 없게 사느냐고 할지 모른다. 가족들도 그리 말하니 그런 말에 특별히 반박을 하고 싶지 않다. 루틴한 삶에 만족하고 이보다 더 좋은 삶이 있을 것 같지 않다고 말한들 누가 관심이나 가지랴.

그런데 이것 하나는 말해야겠다. 이런 삶을 나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하고 있다는 것, 특히 교수들 중에는 나보다 더 루틴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나는 그들과 비교하면 사실 매우 다이나믹한 삶을 산다는 것.

이제 나도 공적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학교에 매일 와 연구실을 지킬 날도 그리 많지 않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필시 나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보낼 것 같지는 않다. 가급적 내 자신에게 충실하고 싶다. 내 내면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쓸데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2023.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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