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삶의 이야기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한 선택들

박찬운 교수 2024. 4. 3. 11:10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한 선택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나는 의미 있는 선택을 하는 것이 그런대로 잘 사는 인생이라 생각해 왔다. 2023-2024 남미여행 중 티티카카호에서.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내가 살아오면서 선택한 의미 있는 것들을. 60년 이상 살면서 내 의지에 따라 선택한 것이 그리 많지 않다. 그저 시간에 떠밀려 다음 일을 했고, 내 환경에 맞춰 의당 기대되는 일을 한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의미 있는 선택도 있었다. 그런 선택은 대부분 나를 고독하게 만들었다. 남이 하지 않은 선택이기에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웠고 마음은 불안했다. 하지만 그 선택이 모아져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오랜 기간 고독한 삶을 살았지만 후회는 없다. 선택의 순간에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나 놓고 보니 큰 것이기도 했다. 잠시 그 선택의 순간을 회고해 본다.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한 선택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기억나는 첫 번째 선택은 중학교 시절 교문을 들어설 때의 일이다. 작은 해프닝이라고 생각될 일이었으나 오랫동안 내 머릿속을 지배한 사건이다. 나는 서울 신당동의 성동중학교를 다녔다. 당시 성동중학교는 성동고등학교와 운동장을 같이 썼고 양 학교의 전교생이 5천 명이 넘었기 때문에 운동장에서 운동하는 학생들과 통학하는 학생들 간에 충돌하는 일이 잦았다. 그런 이유로 학교에선 학생들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로 들어가지 말고 운동장 가에 설치된 보도를 이용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런 지시가 잘 먹히질 않았다. 가로질러 교실로 가는 것이 다리품을 절약하는 터라 몸을 조금이라도 덜 움직이려고 하는 학생들에겐 효과 없는 지시였다. 시간이 지나자 선생님까지도 운동장 한 가운데로 가로질러 교실로 들어갔다. 나는 당시 망설였다. 나도 저 대열에 그냥 낄까? 아니면 조금 불편하더라도 보도를 이용할까? 마침내 나는 선택했다, 보도를 이용하는 것으로. 보도를 걸을 때마다 나는 내 미래가 조금 고독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이런 정도의 미래를 예견하기엔 충분한 때였다. 50여 년이 지난 오늘 나를 보니 그 때 예견이 얼마나 정확한지 속으로 웃음이 나온다.
 
기억나는 두 번째 선택은 고교 시절 운동장에서 있었다. 고2 때로 기억하는 데 그날 1, 2학년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 응원 연습을 하고 있었다. 학교 축구팀이 어느 대회에서 서울시 4강에 올라가자 학교 차원에서 응원을 가기로 했던 차였다. 마침 응원단장이 나의 단짝이었는데 학생들이 이 친구의 말을 따르지 않아 시간만 축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운동장 한 가운데로 달려가 친구의 마이크를 빼앗아 일장 연설을 했다. 당시 내가 한 이야기는 일류학교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너희들 일류학교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장 지방방송 끄고 응원단장 지시대로 연습하고 교실로 돌아가 공부하자.” 나의 이런 당돌한 연설에 지방방송은 삽시간에 꺼지고 응원연습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공공선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생길 때 내가 일어설 운명이라는 것을 나는 운동장을 달려가면서 예견했다.
 
기억나는 세 번째 선택은 변호사가 된 바로 그 해의 일이다. 1990년 나는 군에서 제대를 하고 어느 평범한 법률사무소에 취직했다. 작은 사무소였지만 선배 변호사는 당대 최고의 능력가였고 취급하는 사건도 많아, 나로선 배울 게 많은 곳이었다. 그런데 들어간지 반년이 안 돼 당시 변협회장이었던 P 변호사가 매우 부적절한 사건을 맡아 처리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알고보니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를 주도했던 경찰 고위직을  변호했다는 것이다. 변호사는 어떤 피고인도 변호할 수 있다고 하지만 변호사를 대표하는 변협회장이 민주화에 역행하는 관련자를 변호를 했다는 것은 매우 문제적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나서 며칠 고민했다. 그냥 모른척하고 넘겨야 할지 아니면 문제를 제기해야 할지... 고민 끝에 그냥 넘기지 않기로 했다. 초년 변호사의 당돌한 행동으로 변협회장 퇴진 운동이 시작되었다. 변호사들에게 보내는 격문을 직접 썼고 전화기를 돌려 변호사들의 동참을 호소했다. 이 운동에 민변이 호응했고 자연스레 민변 변호사들과 깊은 동지애를 느꼈다.  내가 민변에 가입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 되었다.  P변호사는 가까스로 임기를 마치기는 했지만 난생 처음 새파란 변호사들의 집단적 반발에 큰 충격을 받고 말년을 쓸쓸하게 보냈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인권법이 내 평생의 업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기억나는 네 번째 선택은 변호사가 되어 몇 년이 지날 무렵의 일이다. 1994년으로 기억하는데, 그해 나는 일본변호사연합회 주최의 심포지엄에 한국 발표자로 참가했다. 몇 개 나라의 법률가들이 초대되었는데 그 중 내가 가장 젊은  법률가였다. 나는 당시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던 터라 일본 법률가들과는 일본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그런데 영어를 사용하는 법률가를 만나니 꿀 먹은 벙어리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말만 통하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머릿속에 쌓여 있었지만 영어가 안되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나는 귀국하는 비행기 속에서 한 가지 결심을 했다. 더 늦기 전에 영미권에 가서 공부를 하자. 나는 귀국 즉시 영어학원에 등록해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2년이 채 안 돼 가족 모두를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 2년을 공부하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반년을 체류하면서 당시 유엔에서 만든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돌이켜 보면 가족을 모두 데리고 미국으로 떠난 간 것은 내 인생에서 큰 사건이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는 귀국 후 일반 변호사의 길을 걷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다. 변호사의 길에서 교수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나는 누구처럼 화려한 선택을 하면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저 내가 처한 환경에서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생을 살고 싶었고 그것을 위해 적잖은 고민을 했을 뿐이다. 그냥 편히 살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현실에 안주하고 싶진 않았다. 선택의 순간엔 크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나 놓고 보니 순간순간이 내 삶의 분수령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앞으로 또 어떤 선택의 순간이 있을까? 담담한 마음으로 내 영혼의 선함을 믿고 대처하고자 한다. 인생 종점에서 이 정도면 그런대로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위해 큰 욕심은 내지 않으려 한다. (2024. 4. 4.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