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일반

북 콘서트 인사말 '기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박찬운 교수 2024. 3. 24. 05:26

북 콘서트 인사말

‘기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박찬운입니다. 긴 겨울이 끝났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춘래불사춘이란 말이 실감났습니다. 봄은 왔는데 봄같지 않았지요. 그런데 오늘은 완연한 봄날입니다.
 
여러분을 이곳에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오늘 오신 분 들 중 많은 분들이 오프라인에서 저를 보는 것이 처음이지요? 어떻습니까? 예상했던 대로 인상이 괜찮습니까? (웃음)
 
우리는 그동안 전기만 꺼지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공간에서 만났습니다. 21세기가 만든 새로운 인연이었습니다. 이 인연은 혈육의 인연, 동창의 인연 등과 같이 우리의 육신이 만나 왔던 인연과는 다른 것입니다. 오로지 우리의 마음으로만 연결된 인연입니다.
 
몸이 연결되지 않으니 가벼울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때론 육신의 만남보다 더 순수한 만남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한 양심,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이 가상의 공간에서 만나는 인연은 과거엔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인연, 신기루 같았던 인연을 몸의 인연으로 바꾸어 또 다른 차원의 인연을 만들어 내는 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좀 거창한 인사말인 것 같군요. (웃음)
 

 
저는 사실 이런 북콘서트에는 친한 사람이 아닙니다. 책을 내고 딱 한 번 제대로 된 기념행사를 거창하게 해 본 적이 있는데,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였습니다. 꼭 20년 전 일본에서 ‘국제인권법과 한국의 미래’라는 책을 냈더니, 출판사에서 출판기념회를 하자고 해, 일본 전역에 있는 제 일본 친구들에게 연락해 동경에서 기념행사를 했습니다.
 
제가 법률서 아닌 대중서를 처음으로 낸 게 2010년입니다.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라는 책입니다. 그 후 이 책 ’기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까지 대중서로 9권을 냈는데, 독자와의 만남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출판을 하면 제 소임은 끝났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런 모임을 하는 것은 이 책이 그저 출판만 하고 내 할 일 다했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조금은 특별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국가인권위원회가 위기입니다. 자칫 어렵게 만든 인권기관이 고사 위기에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살려내는 데 제가 나서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절박한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인권위에 관심을 갖고 걱정을 하는 시민들이 많아지면 언젠가 인권위는 그 기능을 회복하게 될 겁니다. 바로 여러분이 인권위를 살려낼 시민들입니다.
 
’기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 일과 삶의 역사입니다. 이 책은 서문에서 밝혔다시피 3년 동안 제가 꼼꼼히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저는 3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그날의 일을 기록했습니다. 첫 출근일인 2020년 1월 13일 새벽 저는 작지만 큰 결심을 했습니다.
 
공인으로 살아가는 3년을 철저하게 기록하겠다, 3년간 인권위의 사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겠다, 그 기록을 통해 나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매일매일 새기겠다... 그런 결심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결심은 3년 내내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부가 이렇게 세상에 나왔습니다.

 
제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인권위가 어떤 곳인지,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일하는지 알리고 싶었습니다.
 
또 하나는 저의 활동을 통해 바람직한 인권위원의 상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저는 30년 이상 한눈팔지 않고 인권과 관련한 실무와 연구를 해 온 사람입니다. 저는 제 스스로 인권위원이 요구하는 전문성과 현장성을 거의 완벽하게 갖춘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인권위원으로 지냈는지를 정리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권위원의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인권위원으로 인권위에서 일하기 위해선 철저한 자격검증을 통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인권위 사태를 보면 그 생각이 더욱 굳어집니다. 저는 이 자격검증을 함에 있어 그 기준을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제 분투의 여정을 보여줌으로써 인권위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오늘 저는 이 책 이야기를 하면서 인권위에 대한 여러분의 궁금증을 풀어 드릴 생각입니다. 인권위는 왜 요즘과 같은 위기를 겪고 있는지,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 귀한 시간을 이용해 여러분이 평소 저에게 갖고 있던 의문도 풀어 드리고 싶습니다.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 여행은 걸어다니는 독서‘ 이 말은 제가 만들어 퍼트린 말인데, 이 말의 의미도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질문하시면 제가 답하겠습니다. 문자를 통해서만 보아 왔던 저라는 사람의 실체를 이곳에서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제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제 표정을 보십시오. 같이 웃고 같이 즐깁시다. 우리는 지금 삶의 극적인 순간에 있습니다. 바로 이 시간도 저와 여러분의 살아 있는 역사입니다. 오늘 참석해 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 기회에 이런 자리를 만든 이 책의 출판사 혜윰터의 이세연 대표님과 편집자로 수고한 윤현아 선생님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요즘 출판 사정이 정말 좋지 않습니다. 이 정부 들어 각종 지원금이 끊어졌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이런 책을 내는 것은 어렵습니다. 출판사의 희생이 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더라도 출판사가 적자만을 보고 책을 낼 수는 없습니다. 제가 조금 희망을 드리고자 합니다. 제 정년이 3년 정도 남았는데 그 전후로 몇 권의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책 중에는 분명 초대형 베스트 셀러가 있지 않을까요? 여러분들이 팍팍 밀어 주신다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대표님 그러니 희망을 갖고 저자를 관리해 나가십시오. 분명 밝은 내일이 있을 겁니다. (웃음)

마지막으로 오늘 2부 행사로 저와 대담을 맡아 주실 최용성 변호사님께 감사 드립니다. 최변호사님은 제가 가장 아끼는 후배로서  50년 지기입니다. 오늘 여러분을 대신해 저에게 좋은 질문을 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인사말을 마치면서 여러분께 드리는 선물 하나를 마련했습니다. 시 낭송입니다. 저는 이 시를 학기 초나 학기 말에 학생들 앞에서 낭송합니다. 어깨가 쳐진 학생들이 이 낭송을 들으면 힘을 받습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어느 것 하나 맘에 드는 게 없지요. 이럴 때일수록 기운차게 살도록 노력해야합니다. 이 시를 음미하면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라는 생각이 들 겁니다. 19세기 미국의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의 시 인생예찬(A Psalm of Life)입니다. 번역시에 원문을 일부 삽입했습니다.

 
 

 

롱펠로우

 

<인생찬가>

 
슬픈 사연으로 내게 말하지 말라
인생은 한낱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영혼은 잠들어 죽는 것이 아니니
만물의 본체는 외양대로만은 아니란다
 
인생이란 실재이다!
인생이란 진지하다!
무덤이 우리의 종말이 될 수는 없다
Life is real ! Life is earnest!
And the grave is not its goal
"너는 본래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이 말은 본래 영혼에 대한 말이 아니다
 
우리가 가야할 곳, 그곳은 향락도 아니요, 슬픔도 아니다
저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행동하는 그것이 인생이니라
 
예술은 길고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나니
우리 가슴이 설령 튼튼하고 용감하더라도
마치 천으로 감싸진 북과 같이
둔탁하게 무덤을 향한 장송곡을 치고 있느니
 
이 세상 넓고 넓은 싸움터에서
인생의 야영지 안에서
말 못하고 쫓기는
짐승이 되지 말고
억척같이 싸워 이기는 영웅이 되라
In the world's broad field of battle,
In the bivouac of Life,
Be not like dumb, driven cattle !
Be a hero in the strife !
 
미래를 믿지 말라, 비록 그것이
즐거울지라도
죽은 과거는 죽은 채로 묻어두라!
행동하라, 살고 있는 현재에서 행동하라!
Act, act in the living present!
가슴 속에는 용기를, 머리 위에는 신을!
 
위인들의 모든 생애는 말해 주나니
우리도 위대한 삶을 이룰 수 있다
시간의 모래 위에 우리 발자국을 남길 수 있다
 
아마도 후일 다른 사람이
장엄한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다가
외롭게 난파한 그 어떤 형제가
다시금 용기를 얻게 될 때
발견할 수 있는 그런 발자국을
 
자, 일어나서 부지런히 일하자
그 어떠한 운명도 헤쳐 나갈 정신으로
끊임없이 성취하고
추구하면서 일하고 기다리기를 함께 배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