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깊어 가는 가을 빈센트를 만나자-러빙 빈센트를 보고-

박찬운 교수 2017. 11. 12. 06:41

깊어 가는 가을 빈센트를 만나자

-러빙 빈센트를 보고-

 




매우 유니크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러빙 빈센트>. 유화로 만든 에니메이션! 이런 스타일의 영화는 영화사에서 아마도 처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100명 이상의 화가가 참여해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130여 점을 비롯해 6만 점 이상의 유화를 직접 그렸다


기법도 보통 에니메이션과는 차원을 달리 한다. 실제로 배우가 나오는 영상을 카메라에 담은 다음, 화가들이 그 영상을 바탕으로, 에니메이션의 한 프레임 한 프레임을 그려 나걌다. 초당 12개의 그림이 필요했다고 하니... 그 정성이 대단하다. 제작기간 10. 말그대로 이 영화는 고흐를 열렬히 좋아한 두 감독(도로타 코비엘라, 휴 웰치먼, 두 사람은 부부사이다)이 그에게 바치는 헌정 영화다.

영화관에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면 끝날 때까지 화면은 온통 고흐의 그림뿐이다. 고흐를 좋아하는 관객들은 영화관에 왔다기보다는 암스테르담 고흐 미술관으로 순간 이동을 했다고 착각할지 모른.


아를에서 만난 고흐의 절친, 조셉 룰랭(반 고흐, 1888년), 룰랭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내 책 <빈센트 반 고흐, 새벽을 깨우다> 200쪽 이하의 '아를의 소크라테스, 룰랭의 우정'을 참고하시라.

영화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아르망 룰랭(반 고흐, 1888년 )


고흐가 죽은 지 1년 후(1891) 아를의 절친 조셉 룰랭(우편 배달부)은 고흐가 죽기 전 자신에게 준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한 통을 큰 아들 아르망에게 준다. 아르망은 그 편지를 품에 안고 아를을 떠나 고흐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이렇게 해서 영화의 배경은 아를에서 고흐가 아를에 오기 전 활동했던 파리 몽마르트와 죽기 전 70일을 보냈던 오베르 쉬르 우와즈로 옮겨진다.


아르망은 몽마르트에선 고흐에게 물감과 화구를 제공했던 탕기 영감을, 오베르에선 고흐를 치료했던 가셰 박사를 만난다. 이 과정에서 고흐가 그린 그림은 우리 눈앞에서 쉴 새 없이 펼쳐지고 꿈틀꿈틀 살아 움직인다. 고흐가 그린 탕기 영감가셰 박사 초상화가 나타나고, 거기에서 탕기와 가셰는 몸을 움직이면서 아르망에게 말을 건다.


고흐를 물심양면 지원했던 탕기 영감(반 고흐, 1887-8년), 탕기영감에 관한 이야기는 <빈센트 반 고흐, 새벽을 깨우다> 260쪽 이하, '혁명의 용사 탕기 영감을 그리다'를 참고하시라.


고흐는 마지막 여정이었던 오베르에서 가셰 박사(반 고흐, 1890년)를 만났다. 영화는 이 두 사람과의 관계가 알려진 것과 달리 그리 원만치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가셰 박사에 관해서는 <빈센트 반 고흐, 새벽을 깨우다> 102쪽 이하, '천재를 알아본 멜랑콜리, 폴 가셰'를 참고하시라.


영화가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고흐 죽음의 진실이었다. 아르망은 고흐의 지인을 만나면서 고흐 자살에 의문을 품는다. 죽기 전 편지에서 고흐는 당시 상태에 대해서 완벽하게 평온하고 정상 상태’(absolutely calm and in normal state)라고 말한 바 있었고, 오베르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그것을 증언한다. 고흐는 권총으로 자살한 게 아니고 누군가 쏜 총탄에 맞았다는 것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 새벽을 깨우다>, 영화에서 가장 오랫 동안 나오는 장면이 고흐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하는 저 표지 그림이다.


나는 고흐 자살설의 의문에 대해 고흐 그림 이야기 연재(48)에서 다루었고, 그것을 <빈센트 반 고흐, 새벽을 깨우다>(414쪽 이하, '고독한 천재의 최후')에 실었다. 국내에서 이 이야기를 다룬 책은 내 책이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영화에서 나오는 그림 130여 점 거의 대부분은 내 책 <빈센트 반 고흐, 새벽을 깨우다>에서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빈센트 반 고흐, 새벽을 깨우다>와 <러빙 빈센트>는 완벽한 인연을 맺었다. 극장을 나오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이 영화를 감동적으로 보기 위해선 고흐의 삶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리 아름다운 그림들이 눈앞에 펼쳐진다고 해도, 고흐를 모르고 이 영화를 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눈꺼풀이 무거워질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내가 <빈센트 반 고흐, 새벽을 깨우다> 서문에서 한 말을 이 영화 관람을 위해서도 되풀이 할 수 밖에 없다.


"그럼 어떻게 하면 고흐 그림에서 더 큰 감동을 받을 수 있을까. 고흐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의 37년의 삶이 어땠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의 그림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다. 그의 삶은 번민과 투쟁의 연속이었다. 가족과 불화했고, 주변과 다투었으며, 몸과 마음은 병들었고, 가난에 시달렸다. 이런 삶은 고스란히 그의 그림에 나타났다. 고흐의 삶을 이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자료는 그의 편지다. 동생 테오와의 사이에서, 때로는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오고간 900여 통의 편지에는 그의 삶의 여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들 편지를 읽다 보면 우리는 그의 삶을 영화처럼 볼 수 있다."

조금 아쉬운 것은 영화에 나오는 고흐의 그림이 대체로 고흐 생애 후반기에 집중된 것이란 점이다. 고흐 그림은 크게 1886년 파리로 오기 이전, 1886년부터 1888년까지 2년간 파리 시절, 1888년부터 1890년까지 2년 간의 아를 및 생레미 시절, 마지막 70일의 오베르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영화는 그 중에서 아를 및 파리 일부와 오베르 시절을 보여주는 것에서 그쳤다.

파리 이전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아르망이 이왕 파리에 갔으니, 거기서 연인이었던 아고스티나(고흐가 남긴 누드화의 모델)를 만나 고흐의 사랑이야기를 들었으면 어땠을까. 해바라기나 투우장(아를 아레나) 혹은 사이프러스 그림을 보여주면서, 고대 도시 아를의 모습과 프로방스의 끝없이 펼쳐지는 해바라기밭 그리고 거기에 우뚝 선 사이프러스를 보여주었으면 어땠을까. 감독이 내게 고흐 그림을 추천해달라고 했더라면 정말 좋은 작품을 원없이 해주었을텐데...(ㅎㅎ) 좀 아쉽다.


그럼에도 고흐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놓칠 수 없는 영화다. 언제 이런 독창적인 영화를, 언제 이런 노작을 볼 수 있을까. 만일 볼 수 있다면 적어도 한 세대는 더 기다려야 할 지 모른다. 깊어 가는 이 가을, 우리들의 친구 빈센트를 영화관에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