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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룰 수 없는 사랑의 꽃, 상사화, 그 꽃길을 걷다

박찬운 교수 2023. 9. 20. 05:16

 

 
“거룩한 분노는 종교 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 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변영로/ 논개)

 
불갑사에 상사화가 만개했다. 전국 최대 상사화 군락지에 들어선 순간 이 시가  떠오른 것은 무슨 연유일까? 상사화의 그 진한 붉은 색깔이 내 망막에 맺힐 때 그 붉음은 어디에 비할 수가 없었다. 순간 양귀비꽃이 생각났고 그 붉음은 논개의 마음으로 연결되었다. 그렇다, 지금 불갑사의 상사화는 양귀비꽃보다 붉고, 논개의 마음 같은 처절함의 절정이다.
 

 
상사화(相思花). 꽃의 이름에 상사병의 ‘상사’가 들어가니 심상치 않다. 꽃말 자체가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입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고 해서 그리 붙여졌다고 한다. 정말 자세히 보니 수만 송이 상사화가 꽃만 피었지 잎이 없다. 녹색의 긴 순은 각각 붉은 왕관을 쓰고 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불갑사의 상사화의 정식 명칭은 순 우리말로 꽃무릇, 한자로 석산(石蒜)이다. 꽃무릇은 상사화속(屬)에 속하니 ‘붉은 상사화’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붉은 상사화, 곧 꽃무릇을 대규모로 볼 수 있는 곳이 우리나라에선 묘하게도 산사다. 그러니 이 찬연한 꽃을 보기 위해선 전국 3대 상사화 군락지라고 하는 고창 선운사, 영광 불갑사, 함평 용천사 중 한 곳을 가야 한다.

 
절과 상사화? 무슨 인연이 있는 것인가. 이럴 때는 보통 설화가 있는 법. 찾아보니 아닌 것도 아니라 산사의 상사화에는 여러 설화 버전이 있다. 그중에서 넘버 원은 이런 것이다. 옛날 한 여인이 절에 가서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탑돌이를 하였다. 한 젊은 스님이 그 여인을 보고 한 눈에 반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이기에 말도 못하고 애만 태우다가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세상을 떴다. 이듬해 그 스님의 무덤 위에 꽃이 하나 피었다. 사람들은 그 꽃을 상사화라 불렀다.
 

 
사실 내가 상사화를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작년 말 영광 법성포에 갔다가 불교도래지 이야기를 듣고 찾은 것이 불갑사. 몇 가지 자료는 나로 하여금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역사적 고증에 확신은 가지 않지만 백제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이는 4세기 말 침류왕 때 인도승 마라난타라고 한다. 마라난타가 들어올 때 이용한 항구가 지금의 법성포이고 그가 만든 절이 불갑사라고 하니 이 일대는 한반도 불교사의 출발점이다.
 

 
당시 나는 불갑사 경내를 거닐면서 사찰의 면면을 살폈는데 작은 절이지만 한 때 찬란한 과거가 있음을 추측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거기에서 상사화 이야기를 들었다. 겨울인지라 상사화는 피어 있지 않지만 곳곳에 상사화 줄기를 볼 수 있었고 그것이 가을 무렵 꽃을 피우면 이곳 땅은 온통 붉은 영토가 된다고 한다. 절에서 공부를 했던 나로서는 믿기지 않은 풍경이었다. 사진을 통해 본 불갑사의 상사화는 피안의 세계였다. 내가 보기엔 그것은 상사화가 아니가 저 세상의 꽃 피안화였다. 언젠가 이곳에 계절 맞춰 와서 그것을 보리라.
 

 
불갑사 상사화 축제는 매년 9월 중순에 열흘 정도 개최된다. 이 때가 되면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붉은 꽃을 보기 위해 모여든다. 만추의 계절 내장사 단풍놀이가 부럽지 않다. 이곳에서 잠시라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꽃 상사화 속에서 옛 추억을 소환해 보고, 현실로 돌아와 가족들과 30여 분 떨어진 법성포에 가서 굴비정식을 먹는 것도 한 번 쯤 해볼만한 여행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강추!!! (2023. 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