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 동면상태에 들어간 인권정책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매우 우울하다. 우울한 것을 넘어 병으로 도지기 일보 직전이다. 오늘은 내 전공인 인권분야에 대해 한마디하지 않을 수 없다. 언론에서 한 줄 언급이 없으니 나라도 알려야겠다.
나는 지난 30년 간 대한민국의 인권증진을 위해 미력이지만 할 일을 해온 사람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관심은 제도적으로 보다 완비된 인권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다. 내가 두 번(2005-2006 인권위 인권정책국장, 2020-2023 인권위 상임위원)에 걸쳐 인권위에서 일하는 동안 중점을 두었던 것이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을 정부에 권고하는 일이었다.
NAP는 5년마다 정부가 수립하는 인권 종합계획으로 대한민국 중장기 인권청사진을 말한다. 과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연상하면 쉬울 것이다. 경제개발만 중장기 계획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인권분야도 국가의 계획된 행동원칙에 따라 수행되어야 그 발전이 가능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유엔은 세계의 모든 나라에 NAP 시행을 강력 권고해왔다,
우리나라의 NAP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 인권위가 주도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인권위는 정부에 NAP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대한민국이 향후 5년간 집중해야 할 인권청사진을 만들어 권고했다. 이를 위해 3년간 30여 개 전문분야 연구용역(인권상황실태조사)을 실시했고 내외부 전문가 수십 명이 참여하는 추진단을 만들어 권고 초안을 만들었다. 나는 그 과정에서 실무책임자로 일했다. 이렇게 해서 2006년 정부에 권고한 것이 제1차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권고이다.
인권위의 1차 NAP 권고 이후 정부는 인권위 권고에 기초해 NAP를 수립해 시행해 왔다. 정권은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으로 넘어갔지만 예외는 없었다. 그렇게 해서 작년까지 3차 NAP가 끝났다. 이제 올해부터는 4차 NAP가 시작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인권위는 4차 NAP를 위해 2022년 여름 1년 이상의 작업 끝에 4차 NAP 권고를 했다. 나는 그 과정에서 인권위 NAP 권고 추진단장으로 일했다. 인권위는 2023년부터 5년간 대한민국 정부가 중점 추진해야 할 100개 핵심과제를 선정해 각각에 대해 구체적 권고를 했다(여기에는 어제 대법원이 선고한 노동조합원의 손해배상을 제한하는 노란봉투법 관련 권고도 있음).
원래대로라면 작년 말쯤 NAP는 정부(주무 부처 법무부)에 의해 확정되어 올해부터 시행에 들어갔어야 했다. 그런데 2023년이 절반이 지나감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소식이 없다. 내가 아는 바로는 작년에 법무부 인권국이 중심이 되어 NAP 공청회를 열려고 했지만 석연치 않은 이유로 무산된 이래 정부의 NAP 수립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법무부 인권국은 올 중으로 NAP를 수립하겠다고 하는 모양이지만 장관의 관심사에서 벗어난 업무를 하는 인권국이 제대로 역할을 할지 무망한 상황이다.
현재 상황에서 판단하면 이 정부의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수립과 시행은 그 출발부터 잘못되었다. 도무지 이 정부의 인권 의지를 읽을 수 없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그리울 정도다.
또 하나 엄중하게 지적할 문제가 있다. NAP와 직결되는 인권정책기본법 제정 움직임이 이 정부 들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NAP는 그동안 국내 입법적 근거보다는 국제인권법적 근거로 인권위와 정부가 시행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인권위 권고-정부 수립-시행-인권위 모니터링 등의 절차가 근거 법령 미흡으로 정권의 인권 의지에 좌우되었다. 그래서 이것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지난 정부 시절 인권위와 법무부가 새로운 입법을 하기로 합의한 것이 인권정책기본법이다. 여기에는 NAP 뿐만 아니라 국제인권기구의 권고를 이행하는 절차가 규정되어 있고, 현재 지자체의 조례에 근거해 시행되고 있는 지방 인권 시스템의 법률적 근거가 마련되어 있다. 이 법률이 만들어진다면 22년 전 국가인권위원회법이 만들어져 인권위가 탄생한 이후 대한민국의 인권 시스템을 한 단계 올리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지난 정부 하에서 인권정책기본법 입법 움직임은 인권위와 법무부의 상호 협력 하에 진행되었다. 양기관이 오랜 기간 법안 마련에 힘을 기울였고 장기간 협의를 거쳐 합의안을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인권위 상임위원으로서 그 전 과정에 관여했다. 이 법안이 2021년 말 국회에 올라가자, 인권위는 특별히 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정치 입법이 아니기 때문에 여야가 쉽게 합의해 입법절차를 끝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상황이 이 정부 들어선 후 급변했다. 법안이 지난 1년 동안 완전 동면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이 법안은 여도 야도 보수도 진보도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저 국회에서 통과시켜 법률로 공포하면 무조건 대한민국 인권상황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좋은 법안이다. 그런 법안임에도 현 정부가 전임 정부의 일이니 책임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너무나 문제적이다. 인권의 기본을 모르는 정부다. 한동훈 장관은 이 법안의 존재 자체를 알고 있는가. 정부가 이 법안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면 야당이 호응하지 않을 리가 없을텐데, 장관은 무슨 노력을 하고 있는가.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과 인권정책기본법 이야기가 전혀 언론에 나오지 않는다. 언론이 관심을 갖질 않는다. 전문가들도 아는 이가 없다. 대한민국 인권청사진을 만드는 그 중요한 작업이 완전 실종된 것이다.
이것이 현 상황이고, 내가 걱정하고 우려하는 이유이다. (2023.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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