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st Essays/깊은 생각, 단순한 삶

나는 그들보다 행복하다

박찬운 교수 2017. 1. 19. 18:05

나는 그들보다 행복하다

 

런던대학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내 자랑으로 들릴런지 모르겠다. 뭐 그렇게 본다면 어쩔 수 없다. 페북에서 이렇게라도 자랑질을 하지 않으면 어디서 이런 말을 할 수 있으랴.


나는 지난 반년 간 런던에서 혼자 생활했다. 나이지리아 형제들로부터 조그만 방 하나를 얻어 그 친구들과 함께 부엌과 거실을 공동으로 사용했다.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사람들이라면 좋은 환경은 아니다. 그렇지만 집값이 세계에서 가장 비싼 런던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이 방법밖엔 없었다. 어려운 점도 있었지만 나로선 큰 불편함 없이 잘 살았다. 그 생활은 이런 것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다가 6시 반이 되면 부엌으로 나가 그릇에 바나나 하나를 얇게 잘라 넣고 시리얼 한 줌을 넣은 다음 우유를 붓는다. 빵을 굽고, 커피를 내린 다음 어제 퇴근길에 사온 수프를 덥힌다. 이게 내 아침상이다. 밥을 먹고 난 다음에는 함께 사는 친구들을 위해 바로 설거지를 하고 음식물 찌꺼기를 포장해 출근길에 버리기 위해 현관문 앞에 내어 놓는다.


런던의 출근길은 서울 못지않게 붐빈다. 집에서 전철역까진 1킬로미터 남짓. 학교가 있는 브리티시 뮤지엄까진 여러 노선의 전철과 버스가 있는지라, 시행착오를 여러 번 겪은 뒤에 최적의 노선을 알아냈다. 시간에 여유가 있을 때는 전철에 버스도 타보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목적지에서 몇 정거장 앞서 내려, 걸어가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런던시민들의 일상을 관찰한다.

 

 

내가 자주 다녔 UCL 도서관

 


나는 한 개의 도서관만 이용하는 게 아니다. 학교 도서관과 인근 런던대학 소속 하의 몇 개 도서관(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도서관, 런던대학 본부 도서관, 고등법률연구소 도서관) 그리고 가끔은 브리티시 라이브러리를 이용한다. 이 도서관들을 이용하기 위해선 모두 각기 다른 도서관 카드를 발급받아야 하는 데, 어느 누구도 나를 안내하거나, 자세한 설명을 해준 적이 없다. 그저 찾아가서 물어보고 확인하고... 그렇게 해서 카드를 만들었다. 방문학자 중 이렇게 여러 장의 도서관 카드를 만들어 여러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은 나 외에 없다.


점심시간은 학교 주변 식당을 찾아 나선다. 햄버거 하나를 먹어도 맛은 역시 음식점마다 다르다. 약간의 모험심을 발동시켜 한집한집 맛집을 개척했다. 중국음식을 먹고 싶으면 어느 집, 영국의 피시 앤 칩을 먹고 싶으면 어느 펍, 한국 음식을 먹고 싶으면 어느 한국 식당,,, 점심값도 무시할 수 없는 비용이라 가급적이면 싸고 맛있는 집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내 나름의 저렴한 맛집 지도를 만들었다.


오후엔 보통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하거나 글을 쓴다. 그러다가 문득 런던의 어느 곳을 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도서관을 박차고 나가 박물관과 미술관을 찾아 다녔고, 때론 나의 영웅들을 찾았다. 버트런드 러셀, 조지 오웰, 칼 맑스, 찰스 다윈.... 이들이 살았던 집, 이들이 묻힌 곳을 찾았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로지 구글 지도에 의지했다. 그게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때론 목적지를 다 찾아가서도 그 근방에서 한 시간 이상 헤매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찾았고 그 친견에 감동했고 그것을 내 영국이야기에 풀어 놓았다.

 

 

어느 날 오후 조지 오웰이 살던 마을을 찾아 나섰다. 이곳이 오웰이 1980년을 집필하던 시기에 거닐던 케논베리 공원이다.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그가 살았던 아파트다.

 


저녁 시간, 나는 퇴근길에 학교 근처 수퍼마켓에 들어가 찬거리를 산다. 날마다 조금씩 달라지지만 야채, 햄, 올리브, 수프, 고기, 빵을 혼자 먹을 만큼만 산다(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혼자 사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집에 돌아오면 요리가 시작된다. 저녁만큼은 잘 먹어야 한다. 보통은 한식을 준비한다.


밥을 하고, 국과 반찬을 만든다. 몇 달 이런 생활을 한 덕에, 나는 이제 밥 짓는 선수가 되었다(나는 약간 된 밥을 좋아한다. 물 조절을 잘해야 하는데, 나는 이것을 0.1초 내에 육감적으로 할 수 있다!), 나는 누구보다 맛있는 라면을 끓인다(라면 잘 끓이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물과 불의 환상적인 조합을 터득한 사람만이 제대로 된 라면을 먹는다), 나는 잔치국수를 비롯해 몇 개의 국수를 매우 창조적으로 끓일 줄 안다(이거 몇 번의 실패가 있은 이후 터득한 거다.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나는 김치 볶음밥을 초 간단 기법으로 매우 수준 높게 만들 줄 안다(이 비법은 영국 햄과 한국산 고추장에 있다. 아무나 생각하기 힘든 비법이다). 가끔은 꼬리곰탕도 끓인다. 주말 비가 오는 오후 밖에 나가지 못할 때다. 한국 돈 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꼬리곰탕 재료를 사와 장장 4시간 이상을 끓인 다음 거기에 파를 송송 썰어 넣고 후추에 한국산 고춧가루를 넣어 완성한다. 한국마켓에서 사온 갓김치나 깍두기를 곁들이면 한국 유명 꼬리곰탕 집 맛과 경쟁할만하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내 스스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내 것으로 만들었다.

 

 

런던 일링 브로드웨이 어느 펍에서 맥주와 함께 한끼 식사를 하는 모습. 수염이 많이 자랐군요!

 


나는 이런 내 삶을 자랑한다. 이게 왜 자랑이냐고? 그걸 묻는 사람이 있다면 사실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영국에서 박근혜, 최순실, 김기춘, 우병우, 조윤선을 매일같이 보았다. 정말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매일같이 마주한다는 것은 고통이었다. 하지만 이들과 한순간도 마주하지 않을 수 없는 게 나의 운명이다.


나는 멀리 있었지만 내 조국의 아픔을 매일같이 같이했다. 함께 나가지는 못했지만 광화문에서 촛불집회가 있을 때면 런던의 어느 거리를 광화문으로 생각하면서 걸었다. 잠을 자지 못했다. 저들은 내 잠을 깼고 불면의 밤을 이끈 원흉들이다.


나는 저들에 비하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다. 화려한 법률가도 되지 못했고, 돈도 많이 벌지 못했다. 누구를 지배한 적도 없는 그렇고 그런 인생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처럼 되지 않은 것을 하늘에 감사한다. 그들은 말 한마디에 절절매는 사람들 수십, 수백을 거느렸기에, 결코 제 손으로 밥을 하고, 라면을 끓이고, 볶음밥을 만들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지만, 또한 그들은 결코 붐비는 지하철을 타고, 구글 지도를 보면서 런던 시내를 헤맬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입만 가지고 살았던 그들보다 손과 발을 움직이며 세상을 돌아다니는 내가, 이 글을 보며 약간의 감동을 느끼는 우리 모두가, 몇 배나 행복한 사람이란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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