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문학

나의 소박한 한강론

박찬운 교수 2024. 10. 25. 13:46

나의 소박한 한강론

 

 
며칠 동안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지금 이 순간 내 머릿속은 온통 이 두 소설 이야기가 차지하고 있다. 몇 자 적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두서 없는 글을 쓴다. 그렇게라도 해서 이 기억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수년 전 맨부커상을 수상 소식으로 <채식주의자>가 알려졌을 때 우리 문단에 한강이라는 작가가 있음을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채식주의자’를 상찬했음에도 내게는 그 작품이 크게 와 닿지 않았다. 책을 읽고 났더니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 무언가 다른 스타일의 소설임은 분명했지만 평소 소설을 많이 읽지 않는 나 같은 수준의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 소설이었다.
 
‘작별하지 않는다’와 ‘소년이 온다’를 읽으니 비로소 한강이 보인다. 그저 나오는 대로 말한다면, 한강이 노벨상을 받은 것은 그저 우연이나 행운이 아니라는 것, 그는 이 시대 누구보다 상을 받을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는 작가라는 것, 아니 이런 말을 하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그는 비극의 주인공의 마음을 파고들어 그들과 하나가 되는 매우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그는 소설의 소재로 우리 현대사의 최대의 비극을 끌어안았다. 이것은 쉽지 않은 결단이다. 비극을 소설화하는 것은 쓰는 사람도 어렵다. 쓰는 사람도 반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이 편안한 세상, 물질로 쾌락을 누릴 수 있는 이 시대에 힘없는 사람들의 애끓는 이야기를 한번은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소설가의 운명을 걸고 이것을 필사적으로 끌어안는 사람은 귀하고 귀하다. 한강은 두 편의 소설로서 아니 그가 쓴 대부분의 소설에서 그랬다. 이것은 약자의 슬픔에 귀 기울이는 특별한 감성의 소유자 아니라면, 아니 그 이상의 어떤 운명적 사명감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한강은 이 소설로서 역사의 희생자들을 위한 씻김굿을 했다. 그들의 죽음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결코 작별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함으로써 구천에서 헤매는 그들과 슬픔 속에서 살아가는 유족들에게 크나 큰 위로를 보냈다.
 
5.18과 4.3을 소재로 글을 썼다고 하니 이념 편향적이라고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소설을 제대로 읽지 않은 사람들의 편견일 뿐이다. 한강의 소설은 특정 이념을 부각하면서 그것을 선전하거나 그 정당성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특정 이념의 결과로서 역사적 비극이 일어났는지를 밝히는 것은 문학의 역할은 아니다. 문학은 그것과 관계없이 거기에서 희생되었던 인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한강은 그 비극에서 희생된 어떤 한 개인의 삶을 추적한다. 그 개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 어떤 죽음을 맞이 했는가, 죽음의 과정에서 어떤 고통을 느꼈는가, 그를 사랑한 부모와 친구들은 그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그들의 아픔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한강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한다. 5. 18의 광주에서, 4. 3의 제주도에서 형용키 어려운 죽음의 행렬이 있었지만 거기에서도 인간애는 꽃피우고 있었다. 죽음을 애달파하고 한 사람이라도 살리려고 하는 몸부림이 있었다. 총을 가진 진압군 중에서도 사람을 피해 허공에 총을 쏜 군인이 있었다. 여기에 무슨 이념이 중요한가, 중요한 것은 당신이 인간인지 당신이 인간을 포기한 것인지 그것이 중요할 뿐이다. 인간을 포기했다면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강은 끊임없이 그것을 질문한다.
 
두 소설을 작가의 심정으로 읽고자 했다. 어려운 일이었다. 한 쪽을 읽으면 다음 쪽을 읽기 어려웠다.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작중 인물의 마음이 그대로 내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한강의 특별한 능력이 여기에 있다. 그는 단순한 공감능력을 넘어 작중 인물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능력이 있다. 작중 인물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작중 인물과 하나가 된다. 그러니 그의 글은 단순히 남의 글이나 관련 자료를 읽고 남은 공백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메꾸는 정도가 아니다. 그래서 그의 글을 추체험(追體驗, 다른 사람의 체험을 자기의 체험처럼 느낌)의 기록이라고 한다. 문장 하나하나가 연필에 힘을 주어 꾹꾹 눌러 썼다고나 할까. 한 문장을 쓰고 눈물 한 바가지를 흘린 뒤 다음 문장을 썼다는 것을 읽는 사람도 느낀다(실제 그런 모양이다. 한강 작가의 어느 인터뷰에 이 소설들을 쓸 때 그랬다고 한다).
 
한강의 소설을 읽으면서 새로운 문학의 시작을 실감한다. ‘채식주의자’도 그랬지만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는 내가 그동안 읽은 소설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런 이야기는 문학 비평가의 몫이지만 비평가가 아니라도 그것을 인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동안의 소설은 대체로 서사 중심, 즉 스토리 중심의 문학 양식이었다. 일정한 시점(1인칭 주인공 시점, 작가 관찰자 시점 등)에서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라는 형식으로 서사의 흐름이 중시되었다. 그런데 한강의 소설은 이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장마다 화자가 바뀌고 시간의 흐름이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수시로 바뀐다. 머릿속에 서사의 흐름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지만 어떤 경우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 사실 한강의 소설이 읽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 둘을 비교하면 그래도 전자가 후자보다 서사적으론 읽기 쉽다. 나는 이런 문학 양식에 익숙하지 않다. 비평가들 사이에선 이런 문학 양식을 일종의 포스트 모던적 양식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우리 집 딸에게 물어보니 자기들 세대들은 이런 양식이 크게 어렵지 않다고 한다. 이미 드라마도 그렇다고 한다. 세대차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어찌하랴, 세월이 흘렀으니, 그리고 우리의 문학이 여기까지 왔으니.
 
두 권의 책을 읽고 나서 바로 한강의 다른 책을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그의 첫 작품 <여수의 사랑>, 이상 문학상을 받은 중편 소설 <몽고반점>, 아버지 한승원 작가가 문학적 완성도가 높다고 한 <희랍어 시간>, 제목부터 고상한 <흰>을 주문했다. 이들 책을 읽다 보면 한강 작품에 대한 내 이해가 좀 더 깊어지리라 생각한다. ‘소년이 온다’의 영문판 <Human Acts>도 주문했다. 책을 읽으며 큰 호기심이 생겼다.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한 동호 어머니의 넋두리(제6장)를 과연 어떻게 영어로 번역하였는지 궁금했다. 이를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잠을 자지 못하겠다. 이래저래 당분간 한강에 빠져 살 것 같다. (2024.10.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