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삶의 이야기

내 인생 8할이 결정된 곳

박찬운 교수 2023. 5. 25. 10:35
한양대 병원 전망대에서 본 사근동

 
사근동, 내 인생 8할이 결정된 곳이다. 1973년 초등학교 5학년 때 이곳에 왔으니 올해로 만 50년이 된다. 이 기간 중 내가 이곳을 떠나 있었던 것은 1994년부터 2006년까지 10년 조금 넘은 기간이었을 뿐이다. 나는 이곳에서 학교 교육을 마쳤고, 사법시험을 합격해 법률가가 되었다. 결혼한 뒤 3-4년을 이 동네에서 살면서 딸 둘을 낳았다. 30여 년 전 강남으로 이사를 갔지만 교수가 되어 모교 한양대로 오는 바람에 나는 다시 이곳 사람이 되었다.

일과 중 자연스럽게 내 발걸음은 이곳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커피 한잔을 마신다. 연구실로 돌아오는 길에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본다. 이것이 내 삶의 루틴이다. 요즘엔 제자들을 이곳으로 안내해 밥을 사주면서 때때로 옛날 이야기를 해준다. (물론 흥미를 갖는 제자들에 한해서다. 요즘은 함부로 '나 때는...' 이런 식의 옛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친구들이 많아 조심한다)

한양대 정문 건너편은 주상복합 빌딩과 고급 아파트 촌으로 변했다.

 
오늘 출근을 하면서 학교 정문을 바라보니 건너 편에 고층 빌딩이 눈에 들어온다. 벌써 오래 전에 들어선 빌딩군이지만 갑자기 과거와 중첩되면서 새삼 격세지감을 느꼈다. 학교 건너편은 30년 전까지만 해도 허름한 제재소와 불량주택이 빼곱하게 서 있던 곳이다. 여름 철이면 도로는 질척거렸다. 거기가 지금은 40층이 넘는 주상복합 빌딩과 고급 아파트가 들어섰고 가까이에 서울숲 공원이 있다. 한마디로 상전벽해다.

연구실로 가는 길에 사근동 전경을 보기 위해 병원 전망대에 갔다. 이곳에 서면 학교 뒤 사근동이 한 눈에 보인다. 건물 하나 하나는 50년 전의 그것이 아니지만 동네의 원형은 그대로다. 자세히 살펴보니 우리 대학이 세월이 가면서 이 동네를 전체적으로 포위해 왔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학교 건물들이 동네 쪽으로 진격을 진격을 했던 것이다. 이제 남은 가구들도 언제까지 저 모습을 간직할지 모르겠다. 동네에는 여기저기 재개발 현수막이 붙어 있다. 계획대로라면 몇 년 후의 사근동은 역사를 간직한 서민동네의 모습에서 강남식 아파트 단지로 변해 있을 것이다.

아마 그 시기가 내 정년 무렵이 될 것 같다. 정년을 맞이해 이곳을 떠날 때쯤 나의 사근동 시대는 종언을 고할 것이다. 이 진한 추억이야 내 기억 속에서 길게 남겠지만 사근동은 사실상 우리들 모두에게서 사라질 것이다.  청계천 판자촌, 살곶이 다리, 답십리 신답극장, 마장동 한영고, 대성연탄과 도축장.... 이런 이야기를 해 줄 사람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삶이다. 시간이 가면서 내가 받아들여야 하고 인내해야 하는 것, 추억이란 질긴 기억을 더 이상 붙잡지 말고, 그것마저 청계천 물이 흐르듯 그냥 놓아 두어야 한다는 것, 그것을 나는 이제 받아들여야 한다. (2023. 5.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