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영국이야기

영국이야기 3 운명의 돌에 대하여

박찬운 교수 2016. 8. 23. 04:45

영국이야기 3


운명의 돌에 대하여


한국을 떠난 지 열흘이 되었으니 시차적응은 되었다 싶은데 중간에 잠을 깨면 도통 잠을 이룰 수 없다. 지금 시각 새벽 두 시. ㅠㅠ 

나는 어제 저녁 에딘버러에서 돌아왔다. 장장 1500킬로미터의 운전. 한국에서 운전을 하지 않던 내겐 긴 여행이었다. 더군다나 좌측통행에 우측 운전석의 운전이란 긴장의 연속이었다. 운전 하나만도 충분히 글쓸만한 소재다. 하지만 그것은 다음으로 미루자.


잠이 달아나니 에딘버러에서 만난 돌 하나가 생각난다. 그 이야기를 하나 하고 잠을 다시 청해야겠다.


애딘버러 시내 한 가운데 있는 월터 스콧 기념비

에딘버러성에 갔을 때 나는 꼭 한 가지 물건을 보고 싶었다. 어쩜 나는 그것 하나를 보기 위해 2만원이 넘는 입장료를 서슴없이 지불했을지도 모른다.


운명의 돌(Stone of Destiny). 이 돌은 지금 에딘버러성의 꼭대기에 위치한 로열 팔레스에 스코틀랜드 왕가의 최고의 보물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이것은 그저 평범한 사암으로 다듬어진 가로 660mm, 세로 425mm, 높이 270mm의 돌에 불과하다. 보통의 외국 관광객들에겐 관심이 있을 턱이 없다. 그들은 수려한 성의 풍광과 거기에서 내려다보이는 에딘버러시의 고색창연함에 탄성을 지를 뿐이다.


로얄 팔레스 앞에서 입장을 기다리는 관광객들


그런데 내가 에딘버러성의 맨 꼭대기 로열 팔레스에 도착했을 때 그 앞마당엔 수많은 관광객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무슨 이유로 이곳에 이다지도 사람들이 많을까? 잉글랜드인인지, 스코틀랜드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 대부분이 영국인인 것은 그들이 쓰는 언어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들이 이렇게 운집해 있는 것은 바로 그 돌을 보기 위함이었다. 잉글랜드인이든, 스코틀랜드인이건 이 돌이 그렇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스코틀랜드인들에겐 이 돌의 의미는 자못 크리라.

.
이 돌의 내력은 이렇다. 스코틀랜드에선 13세기 전까지 왕이 대관식을 할 때 이 돌에 앉아 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 돌은 스코틀랜드인에겐 왕의 대관석이다. 그런데 이 돌을 잉글랜드인들에게 뺏기고 만 것이다.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1세가 이 돌을 빼앗아 런던으로 가지고 간 것이다. 에드워드 1세? 이 사람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익히 보았을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 나오는 그 포악한 잉글랜드 왕이다.


이 돌을 빼앗아 간 잉글랜드인들은 이것을 런던의 웨스터민스터 사원의 한 의자 아래에 두고 수백 년 간 왕의 대관식에 사용했다. 남의 나라 대관식 돌을 빼앗아 그 돌 위에서 왕이 되니 승자인 잉글랜드인들에겐 두고두고 즐거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들 입장에서 보면 런던의 이 돌은 자신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상하게 하는 상징이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인들은 18세기 초 잉글랜드와 연합왕국을 만들었지만 마음속은 지금도 잉글랜드와 다르다는 의식이 강하다. 이번 브렉시트 과정에서도 스코틀랜드 주민 다수는 잉글랜드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때가 되면 언제라도 잉글랜드와 다른 길을 걷겠다는 생각에 차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스코틀랜드인들이 이 돌을 마냥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둘 리가 없었다. 마침내 그들은 이 돌이 런던으로 간 지 700주년이 된 1996년에 반환을 받게 된다. 돌을 반환 받는 의식은 엄숙했다. 스코틀랜드인 들은 환호했고 잉글랜드인 들은 섭섭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왼쪽의 돌이 '운명의 돌'이다.


나는 이런 역사의 돌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뙤약볕 아래에서 1시간 이상 기다렸다가 드디어 궁 안으로 들어가 이 보물을 알현하려는 순간 사진촬영 금지라는 사인이 보이지 않는가. 제기랄, 왠 이런 일이! 이것을 보기 위해 비싼 입장료와 장시간 기다림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그러나 내가 누구랴. 수많은 관광객들로 인해 전시실은 소란스러웠다. 그 덕에 감시원의 경계의 눈도 잠시 흐려지는 것을 눈치 챘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조용히 셔터를 눌렀다. 이렇게 해서 오늘 여러분이 보는 이 사진이 탄생했다.


사진 상의 돌이 그 운명의 돌이다.


(2016년 8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