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 단상
-연구실을 둘러보며-
금요일 아침 일찍 연구실에 나와 다음 주 강의를 준비합니다. 저는 연구실에 있을 때 가장 큰 행복감을 느낍니다. 저는 이곳에서 학문의 자유를 만끽합니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온전히 제 의지대로 이곳에서 제 하고 싶은 연구를 합니다. 저는 이 공간의 완벽한 성주입니다. 이 같은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합니다. Gracias a la vida!
강의 준비를 얼추 마치고 잠시 연구실을 둘러보면서 옛 생각에 빠집니다. 제가 어렴풋이 학자의 길을 가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된 때가 대학 4학년 겨울(1984년)입니다. 저는 그때 철이 들고나서 처음으로 긴장을 풀어봅니다. 그해 가을 사법시험 최종 합격 통지를 받았거든요. 이제 한숨 돌릴 수 있다 생각하니 마지막 겨울방학을 무엇인가 다르게 지내고 싶었습니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이런 인생 질문에 스스로 답하고 싶었습니다.
이때 뜻하지 않은 즐거운 일이 있었습니다. 평소 존경하는 한 교수님이 겨울방학 중에 당신의 연구실을 쓰라는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보직을 맡고 있어 방학 중에 연구실에 나갈 틈이 없으니, 연구실을 내줄 테니 거기에 나와서 공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 너무 기뻐 매일 연구실로 출근하면서 학자연 시늉을 내보았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면 석유난로를 켜 방을 따뜻하게 만든 다음 차 한 잔을 마시면서 노교수의 일상을 맛보고, 교수님 서가에 있는 책을 내 책인 양 꺼내 읽어갔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즐거운 기억이었던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제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나옵니다.
오늘 아침 연구실을 청소했습니다. 과거에는 조교에게 연구실 청소를 부탁한 적이 있지만 최근에는 조교에게 그런 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제가 빗자루로 쓸고 걸레질을 합니다. 머릿속에는 꼬박 40년 전 교수님 연구실을 청소하던 생각이 떠오릅니다. 교수님 연구실에 있으면서 일주일에 한번 청소를 했거든요. 교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한 것이 아니라 제가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언젠가 내 인생에 이런 연구실이 주어진다면 이렇게 청소를 하리라. 내 연구실을 내 삶의 가장 멋진 공간으로 만들 것이다. 제자들이 연구실에 오면 그들에게 들려줄 무궁무진한 소재를 준비할 것이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지요.
세월이 흐른 뒤 생각해 보니 이곳이 제가 40년 전 그리던 연구실입니다. 이 공간엔 수많은 사연이 있고 이야깃거리가 있습니다. 머지않아 저도 학교를 떠나게 되겠지요. 앞으로 몇 번 겨울을 맞이하면 이 연구실과는 영원히 작별을 할텐데, 그때까지 한 친구를 만나 이 연구실을 잠시 내주고 싶군요. 그래서 제가 학창 시절 경험했던 그것을 경험케 하고 싶어요. 만일 그런 기회를 준다면 그 친구의 앞날에도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이것이 그저 저 같은 꼰대 선생의 부질없는 희망사항일까요. (2024.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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