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 98

건지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며칠 동안 짬을 내 소설 한권을 읽었다. 미국 작가 메리 앤 섀퍼의 . 지난 주 넷플릭스에서 본 동명의 영화를 보고 나서, 그 감동이 가시기 전에 책을 주문해 읽었던 것이다. 메리 앤 섀퍼는 사실 무명 작가다. 2008년 74세의 일기로 삶을 마감했지만, 그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작가라는 소리를 들은 적은 거의 없다. 그녀는 웨스트버지니아의 소도시에서 평생을 살면서 사서와 서점 직원으로 일한 지극히 평범한 여성이다. 다만 그녀는 다정다감한 가족들과 형제들에 의해 둘러쌓여 항상 이야기 꽃을 피우는 환경에서 살았다. 그녀는 가족과 형제들에겐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라자드와 같은 이야기꾼이었다. 평생 책을 끼고 살았던 그녀에게 한 가지 소망이 있었다면, 그것은 누구나 출판하고 싶은 소설 한 권을 쓰는 것이었다. 그..

로맹가리의 <새벽의 약속>

즐거운 고통, 읽기작년 초 공직에 임명되고 나서부터는 책다운 책을 진득하게 읽기 어렵다. 몸도 마음도 바쁘니 한 자리에 몇 시간씩 며칠을 보내면서 책을 읽기가 여간 부담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몸과 마음이 조금 지쳤다는 거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수백 쪽의 안건 보고서를 읽고 오면 집에선 당최 문자로 써진 어떤 것도 보기 싫다. 그저 머리 식힐 겸 영화나 보는 게 그나마 낙이다. 그 덕에 지난 한 해 수년 치 볼 영화를 한꺼번에 보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지난 며칠 간 열심히 읽은 책이 있다. 로맹가리의 (심민화 옮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동명의 영화를 보고 진한 감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예사롭지 않은 모자지간의 사랑이 한 문호의 삶을 지배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바로 책을..

코로나 상황에서 읽는 기후위기의 정체-조효제 교수의 <탄소사회의 종말>-

독서하기 힘든 때지난 수 십 년 간 내 몸에 체화된 것이 있다면 책 읽기다. 거의 강박증에 가깝다. 화장실 갈 때도 항상 손엔 책이 들린다. 지하철을 탈 때도, 비행기를 탈 때도 작은 가방엔 책 몇 권을 넣고 도착 때까지 단 몇 쪽이라도 읽는 게 굳어진 내 삶의 패턴이다. 그리고 그 책 중 무언가 강한 울림이 있는 것은 독서가 끝나는 대로 정리한다. 간단하게 정리할 때도 있지만 때론 200자 원고지 50-60장 분량 이상으로 정리하기도 한다. 이런 독서에 대한 강박증상이 인권위에 와서는 깨져 가고 있다. 무엇보다 집에 돌아오면 피곤하고 글자 보기가 어렵다. 책은 쌓여 있지만 손이 안간다. 시간이 있으면 책보다 영상을 대한다. 그러니 과거에 하지 않던 영화보기가 날로 늘어 간다. 올해만도 이리저리 본 영화..

원님재판, 그것이 조선시대 재판의 실상이었을까?

며칠 동안 퇴근하면 만사 제치고 책을 읽었다. 숭실대 민사소송법 교수 임상혁이 쓴 와 . 법학자가 조선 중기 노비소송을 분석하면서 당시 법과 사회를 연구한 책이다. 아마 기존 사학자들이 이 책을 본다면 상당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사학자들도 역사를 연구하면서 매우 사회적 파장이 큰 소송의 존재를 알았다면 어떻게든 그 의미를 역사로서 기술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수준은 사실관계와 그 파장 정도를 알리는 것에 국한되지 않을까. 그 소송의 내용을 현대의 법학으로 재해석하고 의미를 파악한다면 그 사건의 이해는 한층 깊어질 것이지만 그것은 법학 전문가가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현대법학으로 무장하고 역사를 추적해 사료를 발견해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그런 역사적 기술의 적격자인데... 그 사람이 누구일까? 과문한 탓..

궁극의 독서(신간 소개)

나의 7번 째 인문교양도서가 출간되었다. 그동안 읽은 책 중 기억하고 싶은 책을 정리한 것이다. 나는 평소 독서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 “인생을 살면서 잘한 일을 꼽으라면 이것밖에는 없습니다. 여행과 함께 독서 말입니다. 여행과 독서는 다른 것 같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이 둘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과정입니다. 결국 ‘책을 읽는 것’입니다.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걸어 다니는 독서’입니다. 독서는 책상 앞에서 책을 통해 세상을 배워나가는 여행입니다. 여행은 몸을 움직이면서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세상이라는 거대한 책을 읽는 것입니다. 제가 젊은 분들에게 권할 수 있는 것은 이 둘뿐입니다.”(서문) 코로나 19로 신음하는 작금의 상황에서 나는 왜 이런 책을 내놓았을..

고통의 땅에 사는 나의 형제자매여! <연을 쫓는 아이>

문학으로 알린 아프카니스탄의 아픈 역사 이 소설을 읽은 것은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코로나 사태로 미국 유학에서 일시 귀국한 둘째 딸이 집안에 널려 있는 책을 정리하던 중, 집사람이 이 책을 발견하고 읽은 다음, 내게 한 번 읽어볼 것을 권유한 것이다. 맨날 딱딱한 책이나 읽고 있는 남편이 딱했던 모양이다. 무슨 소설이든 처음부터 흥미진진할 수는 없는 법, 얼마간 무료한 시간을 보냈지만, 의외로 빨리 삼매경에 빠졌다. 일요일 하루 종일 서재를 떠나지 않고 이 책을 읽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책에 밑줄을 치기 시작했고, 또 언제부터인지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를 사로잡은 소설 (The Kite Runner, 이 책은 두 번역자에 의해 국내에 번역되었다. 나는 2005년 이미선이 번역한..

수정같이 맑은 정신, 박홍규

수정같이 맑은 정신, 박홍규-고독한 독서인 박홍규와 작가 박지원의 대화, 를 읽고- 당신 얼굴에 나타난 것은 / 어떤 권력도 빼앗을 수 없는 것 / 어떤 폭탄도 산산조각으로 부수지 못할 / 수정같이 맑은 정신(조지 오웰이 스페인 시민전쟁의 무명용사를 노래한 시) 나는 보이지 않는 대담의 참여자학기가 끝나 성적처리를 한 다음 잠시 짬을 내 한 권의 책을 읽었다. 젊은 작가 박지원이 영남대 교수를 지내고 이제 부인과 함께 노후의 삶을 보내고 있는 박홍규 교수와 10여 차례 대담을 하고 엮은 라는 책이다.나는 지난 20여 년 동안 꽤 많이 박홍규 교수의 책을 읽었다. 그래 보았자 그가 쓰고 번역한 150여 권 중 3분의 1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것들 중 상당수는 내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책은 고독한 나의..

지적인 사람들을 위한 보수주의 안내서

지적인 사람들을 위한 보수주의 안내서 -러셀 커크 지음, 이재학 옮김- 주말을 이용해 책 한 권을 읽었다. 러셀 커크의 . 이 달에 출판된 책이다. 번역자인 이재학 선생이 내게 이 책을 보냈다. 책 속에 메모지 한 장이 끼어 있었는데, 작년에 이 선생이 번역한 러셀 커크의 대작 을 읽고 쓴 북리뷰에 대한 답례로서 보낸다는 것이다. 가끔 저자나 역자로부터 이런 선물을 받는데, 책을 소개한 사람으로서, 기쁘기 한량없다. 는 대작 의 축약판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한 요약본은 아니다. 커크의 이 미국 보수주의의 계보를 고찰하면서 그 (정신의) 정수를 탐구한 학술서라면(따라서 연구자가 아니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는 매우 어려움), 이 책은 그 정수를 대중을 위해 간략하게 정리한 대중서다. 200..

한 예술품 애호가가 이루어 낸 아시아 최고의 서양미술관-일본 국립서양미술관 60주년을 맞이하여-

역시 미술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 요즘은 뜸해졌지만, 한 때, 나는 일본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90년대 초 변호사 수가 많지 않던 시절, 나는 한국 변호사 중 일본에 꽤나 알려진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일본어를 좀 배우고 난 뒤, 적잖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좌충우돌, 일본 각처의 변호사회를 다니며 얻어낸 결과였다. 당시 내 주된 관심사는 인권 관련 일이었다. 이제 막 30세에 접어든 한국 변호사가 일본 변호사회를 찾아, 20년 이상 선배격인 일본 변호사들을 만나, 매우 당돌하게 묻고 자료를 달라고 했다. 그런 덕에 일본 변호사나 법학교수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로 인해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들은 때때로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고, 이로 인해 적잖은 글을 30대의 젊은 나이에 일본에서 발..

‘반일 종족주의’, 말문을 잃게 하는 이영훈 교수의 ‘일본군 위안부’ 주장

이영훈 교수와 그의 사단이 ‘반일 종족주의’에서 강제징용과 함께 대한민국 반일 종족주의의 극단적인 예로 제시하는 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다. 이교수는 위안부 장을 다룬 총 120쪽 글에서 80쪽이 넘는 양을 직접 쓰고 있다. 그만큼 위안부 문제는 반일 종족주의를 주장하는 그에겐 중요한 이슈라고 할 수 있다. 이영훈 교수의 관점 이교수는 지난 30여 년간 국내외에서 형성되어 온 성노예로서의 위안부(그러므로 이를 운영한 일본군은 국제범죄의 당사자가 됨)를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이교수가 위안부를 보는 관점을 그의 글로 직접 확인해 보자. “저는 위안부제를 일본군의 전쟁범죄라는 인식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 그것은 당시의 제도와 문화인 공창제의 일부였습니다. 그것을 일본군의 전쟁범죄로 단순화하고 줄기차제 일본..